1420년 3월 16일 20대 초반의 새 군주 세종은 당시 유명무실하던 집현전을 개편하고 10명의 젊고 유능한 관리를 가려 뽑아 새 시대를 열 비전 팀을 가동했다. 피로 점철된 태종시대의 개국 사업을 마감하고 문치의 백년대계를 꿈꾼 것이다. 고려 시대부터 조정에는 경연(經筵)제도가 있어서 신하들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임금에게 강의한 후 임금과 신하가 함께 토론했다. 세종은 강의를 맡은 경연관이 다른 직책과 겸직이어서 깊이 있는 강의를 하기 어렵다고 보고 경서와 사서 연구 및 강의를 전담하는 관리를 집현전에 둔 것이다. 경서는 유교의 경전이며, 이를 통해 통치 원리를 배울 수 있다면 사서로 과거에 실시된 정책의 성공과 실패 사례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미래를 개척하고자 한 젊은 군주는 집현전의 새로운 출발을 통해 새 왕조에 걸맞은 기풍을 진작하려는 자신의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세종은 경연에서 토론방식을 혁신하고 운영을 합리화했다. 이에 따라 집단지성이 발휘됐다. 집현전은 국가경영에 필요한 모든 지식의 집합소가 됐으며, 경연의 논의에 따라 필요성이 제기된 서적의 집필이나 기구 제작에 관한 일차적 업무를 담당하게 돼 정보센터 및 디지털 아카이브 기능을 갖춘 연구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세종은 지속해서 인재를 집현전에 배치, 그 기능을 강화했다. 세종을 정점으로 리더십을 구현하는 경연과 집현전이 각각 소프트웨어(SW)와 하드웨어(HW)를 담당함으로써 형성된 세종의 창의적 트라이앵글은 15세기 전반기에 세계 최고 과학기술문명을 이룩하는 결과를 낳았다. 세 꼭짓점은 상호의존적으로 전체적 발전을 가능케 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트라이앵글이 세종 당대에 이미 쇠락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세종의 건강이 악화해 재위 21년(1439년)에 경연이 중단됐다. 이에 따라 집현전 활동도 위축됐으며, 집현전 학사들도 연구보다는 정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1960년대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과 함께 정부출연연구기관 시대가 시작됐다. 과학기술 분야 연구개발(R&D) 활동을 통해 국가 경제발전 및 경쟁력을 제고하고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출연연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박정희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주도돼 R&D 불모의 땅에 선진국형 연구기관을 세워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인 과학 인재를 유치한 것은 여러모로 세종시대 개막과 함께 새롭게 출범한 집현전에 비유될 수 있다.
KIST로 대표되는 출연연이 박정희의 산업화 초기 단계에 경제 발전을 견인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낮은 생산성, 연구를 위한 연구, 시장과의 괴리 등 비판에 직면하게 돼 출연연을 근원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출연연의 빛이 바랜 데에는 박정희와 같은 과학기술로 마인드화된 강력한 리더십이 몰락하게 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집현전과 출연연은 실로 데칼코마니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두 기관이 모두 리더십 의존형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강력한 리더십은 이 두 기관의 생산성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리더십 자체가 직접적으로 역할했다기보다는 생산성의 모태가 되는 창의성 발휘에 필요 불가결한 자율성이 리더십에 의해 보장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출연연의 자율성은 주로 공무원들에 의해 침해된다. 출연연 연구원과 담당 공무원이 조우할 때 출연연의 자율성은 위협받게 된다.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은 이 같은 접촉이 있더라도 연구원의 자율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박정희류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 상황에서 출연연이 자율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없을까. 누군가가 연구원과 공무원이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중간에서 쿠션 역할을 하게 하면 어떨까.
현 시스템에서 연구원과 공무원 간 조우를 차단하고 거중조정역을 맡을 수 있는 기관은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NST가 대외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간섭을 막고 대내로는 출연연을 감싸 안음으로써 적극적으로 출연연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으로 판단된다. NST는 산하 출연연에 대해 획일적인 지침을 자제하고 출연연 간의 다양성에 기반을 둔 창의성이라는 싹을 길러 줘야 할 것이다. 또 다양성에 따른 진화적 부침을 모니터링해서 출연연들이 상호 비교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NST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출연연 간 협력 연구를 유도하는 이 시대의 경연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과학기술적 거대 담론과 거시적인 창의적 집단지성을 가능케 하는 모더레이터가 돼 출연연의 자율성 확보에 따른 창의성과 생산성 증진을 이끌 수 있다. 이는 과거 KIST의 최형섭 원칙, 즉 '최고의 인재에게 최대의 자율권을 보장한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NST가 출연연의 자율성 확보를 위한 실효성 있는 방벽이 되기 위해서는 NST 위상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세종과학기술연구원의 정책보고서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NST 이사장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직을 겸하도록 하는 방안이 적극 검토돼야 할 것이다.
유장렬 세종과학기술연구원 이사장 jrliu21@gmail.com
-
김현민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