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수업에 충실했어요.” 수석합격자들의 인터뷰다. 나는 무엇에 충실했기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을까. 우리는 실력으로 판가름한다면 수긍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출신·가문이 아닌 실력으로 지위가 결정되는 시스템이 마이클 영(Michael Young)의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다.
예전에는 실력이 없어도 대학에 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도 회사가 가르쳤다. 고등학교 졸업하나 대학 졸업하나 큰 차이가 없어서 다시 가르쳐서 일을 시켜야 했고, 한 번 직장은 평생 직장이 됐다. 부유층도 자녀에게 재산이나 회사를 물려주기에 부담이 없었다. 자녀가 무능해도 좋은 참모를 붙여서 재산과 회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다 빈부 양극화가 극심해졌다. 해결책으로 부유층의 재산·상속에 높은 세금을 매기고, 자녀가 받던 취학이나 취업 등 다양한 혜택을 제한했다. 부유층은 전략을 바꿨다. 자녀에게 재산 또는 회사를 물려주는 대신 좋은 선생·교육·경험을 제공해서 실력자로 만드는 방향을 전환했다. 공교육에 사교육을 더했다. 자녀가 알아듣지 못하면 선생과 환경을 바꿨다. 자녀에 대한 집중투자가 시작된 것이다. 기업도 갖춰진 인재를 채용하면 될 뿐 돈 들여 가며 가르쳐서 쓸 이유가 없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력자들이 창업이나 취업을 하면서 지위·보수 격차가 커졌다. 우수한 노동이 그렇지 못한 노동을 대체했다. 학교도 추세에 맞춰 좋은 일자리를 찾아 주는 직업학교로 바뀌었다. 사설 외국어학원·전문학원도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니 공교육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2021년 3월 통계청 기준 청년실업은 42만6000명이다. 빈부 양극화는 실력 양극화를 대물림한다. 취약계층이 다른 계층으로 올라탈 수 있는 계층 사다리도 사라지고 있다. 성공 스토리를 쓴 사람은 자신의 생각·행동이 항상 옳다고 여기고, 잘못되면 남 탓이나 운 탓을 한다. 취약계층은 스스로 무능력을 탓한다.
실력중심사회는 항상 옳은가. 실력 상속은 문제가 없는가. 실력을 중시하는 게임 규칙은 공정한가. 헌법은 국민의 기회균등을 선언하고 있다. 기회가 균등하면 실력 중심으로 돌아가도 되는가. 기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공정한지도 봐야 한다.
실력중심사회 문제에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부유층이 자녀에게 쓸 돈을 세금으로 걷자는 소득세 중과, 취약계층에 기본소득 지급, 여성·장애인·지역 일자리 할당, 대학 입학 기회 제공, 명문대 재정 지원 축소와 학생 정원 확대, 인간 존엄 교육 활성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정부에 정책이 있다면 민간에는 대책이 있다. 앞에서 열거한 방안은 풍선효과를 초래하고 실력 투자를 우회, 고착화할 위험이 있다. 미래는 인공지능(AI) 시대다. AI를 활용해 실력주의에 따르는 양극화를 해결할 작은 사다리 하나 만들 수 없을까.
맞춤형 AI 교육이다. 세상 모든 자녀가 판사, 의사, 정보기술(IT)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될 필요는 없다. 지금도 많은 판사, 의사, IT 기업 CEO가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필자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는 모두 다른 유전자를 타고났다. AI를 통해 자녀를 분석하고, 맞는 교육 자료와 환경을 제공하자. AI로 적성에 맞는 다양한 일자리를 추천하자. 특정 일자리에 수요가 몰리지 않고 다양화되면 각자의 역할을 존중하는 사회가 된다. 기술을 몰라도 발명, 저작 등 창작할 수 있는 세상이 오고 있다. 굳이 판·검사에 목맬 이유가 없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아도 좋다. 물고기도 나오고 학도 나오고 소금쟁이도 나오게 하자. 그것만이 서로가 존중하는 AI 시대 민주주의와 시장 질서를 확립하는 길이다. 여기에 나랏돈을 쓰자. 대통령이든 누구든 권위 있는 자가 좌절하는 이 땅의 청춘에게 한 말씀 해 주면 좋겠다. 여러분이 못나서가 아니라고. 여러분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AI-IP특별전문위원회 위원장)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