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디지털 전환과 입법 전환

기술 발전 자체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기술 진보는 사회 공동체 가치가 투영될 때 이뤄질 수 있다. 그래야만 모두를 위한 디지털 전환이 이뤄진다. 이런 의미에서 디지털 전환에 대비하는 입법은 중요하다. 현 시점은 바로 디지털 전환의 맥락에 부합하는 입법 전환을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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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기술(ICT) 분야 입법에서 규제혁신 논의는 이미 오랜 기간 이어졌다. 그러나 괄목할 입법 성과 확인은 어려웠다. 매번 비판의 화살은 헌법상 입법 권한이 부여된 국회를 향한다. 이 때문에 열릴 때마다 '일하는 국회'라는 모토는 반복된다. 이는 지난 2020년에 개원한 제21대 국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그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시대 요청을 제대로 반영하기는 어렵다. 20대 국회만 하더라도 4년 동안 2만4141건의 법안이 발의·제출됐다. 디지털 전환에 관한 법안을 직접 다루는 20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만 한정하더라도 이 기간에 1044건의 법안이 다뤄졌다.

막대한 양의 법안 건수를 상정해 볼 때 아무리 개별 국회의원이 열심히 일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법안 심의를 수행하기는 물리력의 한계가 있다.

법안 발의 수량의 과도함은 법안의 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20대 국회에서 발의·제출된 주요 ICT 법안의 약 73%가 규제 내용을 포함하는 법안이었다. 이 가운데 약 97%가 국회의원이 발의한 것이다. 게다가 발의·제출된 주요 ICT 규제 법안의 약 69%는 제도로 심의되지도 않고 폐기됐다.

국회의원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 심의 대상 법안이 증가하고, 결국 이목 집중을 위해 규제 법안을 양산하는 악순환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복된 연쇄 과정을 통해 규제를 예외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상황이 연출된다. 이 때문에 사회에서 아무리 규제 혁신, 정확히는 불합리한 규제 철폐 요청이 있다 해도 국회를 최종 통과한 입법의 대부분은 설익은 규제를 포함한다.

20대 국회의 규제 입법 실패의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은 단연 이른바 'n번방 방지법'으로 불리던 법안이었다. 'n번방'은 사회에 큰 공분을 산 사건이니만큼 당연히 중요한 입법 논제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지난해 3월 23일부터 5월 7일까지 46일 동안 내용이 유사한 규제 법률안이 15건이나 발의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 쟁점 사안을 숙고하기에 앞서 완비되지 않은 유사한 내용의 규제 법안을 경쟁하듯 양산해 냈다. 이 과정을 거쳐 통과된 'n번방 방지법'에 대해서는 실제 입법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고 오히려 불합리한 규제만을 설정했다는 비판이 가해진다. 다시 말해서 국회의원들이 법안만 발의하고 막상 심의 과정에서는 국민을 대신하는 관찰자로서의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한다면 디지털 전환을 발목 잡는 입법 지체, 더 나아가 입법 실패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발의 법안을 신중하게 검토할 수 있는 환경과 더불어 심사 대상 법안을 전문가 시각에서 검토할 수 있는 효율 높은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즉 디지털 전환에 부합하는 입법 전환을 위해서는 단순히 일하는 국회가 아니라 '일할 수 있는 국회' 시스템으로 정비해야 한다.

'일할 수 있는 국회' 시스템 정비의 핵심은 바로 입법영향평가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입법영향평가는 법안이 미치는 영향을 사전에 과학 원칙으로 분석함과 더불어 관련 법안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의 입장과 의견을 체계화해서 제시함으로써 입법자들의 판단을 지원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사실 이런 방식은 제도화돼 있지 않더라도 시민을 대의하는 국회의원이라면 당연히 자체로 이행해야 하는 일종의 정치성 책무다. 그러나 우리 국회의 입법문화는 이 정도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입법영향평가를 제도화함으로써 신중한 입법 검토와 발의 문화를 정착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디지털 전환 시대에 걸맞은 입법 전환을 이룰 수 있다.

심우민 경인교대 입법학센터장 legislation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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