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은 기존의 시장 질서를 흔들어 놓기 때문에 파괴적 기술로 표현된다. 이러한 파괴적 기술에 기초한 비즈니스 모델은 기존의 규제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 예견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포지티브 규제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혁신 서비스가 규제 때문에 시장에 출시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이러한 현상을 기술 4.0 시대에 정책 1.0이 초래하는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네거티브 규제 시스템이 적용되는 국가에서는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에 기초한 기업은 규제 적용을 받는 반면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기초한 기업은 규제를 받지 않아서 기존 기업과 기술 기업 간 규제의 형평성 문제를 일으키고, 심지어 기존 규제에 반하는 경우에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시장 진입을 추진해서 사회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페이팔과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 공동 창업자인 피터 틸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관료와 정치인들의 기술에 대한 몰이해로 사회가 처한 문제의 해결을 지연시켜서는 안 되고, 기술로 해결 가능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며 기술 기업 입장을 대변한 바 있다.
이러한 기술 기업의 시장 접근 전략은 '허락이 아니라 양해를 구하라'는 문구로 표현된다. 이러한 입장은 경제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 기존 질서의 틀을 넘어 기술이 사회발전을 선도해야 된다는 기술결정론에 철학적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기술결정론의 대척점에 기술은 사회의 필요에 의해 개발되고 수용된다는 사회기술구성론이 있다. 즉 사회의 선택을 받는 기술은 최고 기술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수용성이 가장 높은 기술이라는 의미로 사회의 안정과 공동체의 공공 이익이 기술 발전의 경로를 정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장에서 기존의 기업과 신기술에 기반을 둔 기업 간에 공정한 경쟁을 담보하면서 혁신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도입된 제도가 규제 샌드박스 제도다. 지난 2014년 영국에서 새로운 핀테크 서비스가 기존 규제의 틀을 벗어나 일정한 범위에서 서비스를 한시 제공할 수 있도록 시작된 규제 샌드박스 제도는 최근 금융 분야를 넘어 통신, 운송, 의료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로 적용이 확대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넓은 분야에서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2019년에 제도가 도입된 이후 2020년까지 총 364건의 과제가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통해 해결됐다. 모바일 운전면허, 공유주방 서비스, 택시 동승 중계서비스 등이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출시됐다.
규제 샌드박스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갖춘 기업의 시장 진입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업 평가를 통해 샌드박스 연장 또는 제도 개선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기존 사업자도 변화 대응 능력을 개발할 수 있고, 제도 개선 방향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그의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정한 사회는 효용 극대화와 기회 균등 보장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사회 전체 공동의 선이 존중되는 사회여야 한다고 정의한 바 있다. 앞으로 더욱 효과 높은 규제 샌드박스 제도의 활용을 통해 신기술 발전과 사회 공동체 이익이 동시에 보장되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민원기 한국뉴욕주립대 총장 wonki.min@suny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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