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17>윈스턴 처칠 (하) 혀와 펜으로 이긴 전쟁

“나는 행복하게 살았으며, 당신은 한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고상한가를 내게 가르쳐주었소.”

더 타임스가 1973년 1월 4일 고 윈스턴 처칠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개했다. 20세기 영국 최고의 정치가 처칠이 아내 클레멘타인에게 보낸 편지는 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참호 속에서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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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 전장에서 그는 매일 밤 아내 사진에 키스한다고 말했다. 처칠은 전사에 대비해 편지에 이런 내용을 남기기도 했다. “행여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기백 있는 남자요. 죽음은 사고일 뿐, 우리 인생사에서 중요한 일이 아니라오. 앞을 내다보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삶을 즐기며 아이들을 키우고 나의 기억을 간직하시오. 신의 가호를 빌며.”

처칠은 모든 연설문을 직접 썼다. 전시 내각을 이끌며 방에서 혼자 새벽까지 연설문을 썼다. 비서에게 밤새 쓴 연설문을 건네준 뒤 잠을 청했다. 처칠은 명문 해로스쿨 시절, 수학과 라틴어에는 고전했으나 영문학과 역사에 뛰어났다. 처칠은 군인, 정치가이기 전 30대부터 어마어마한 인세를 챙긴 작가였다. 20여권 역사서를 썼다. 고급 저택에서 시가와 와인을 즐기는 여유로운 삶은 20여권 인세 수입으로 가능했다. 처칠은 종종 자신의 이력을 이렇게 과시했다. “평생 먹고 살 돈을 혀와 펜으로 벌었다.”

처칠은 유럽이 독일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에서 영국의 힘만으로는 독일을 물리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처칠은 루스벨트, 아이젠하워, 몽고메리 장군 등 여러 지도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영국이 모든 재정을 소비한 뒤 뼈만 앙상하게 남고 미국만 건전한 재정을 유지한 채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이는 올바른 일이 아닐 겁니다.”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는 1000통이 넘었다.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내려 노력한 처칠은 필사적이었다. 편지라기보다 보고서에 가까웠다. “만약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받는다면 영국은 한 시간 이내에 참전할 것입니다.” 국내 반전 여론을 빌미로 어물쩍한 태도를 보였던 루스벨트는 진주만 공격을 받은 후 참전을 선언했다.

처칠의 글은 한 편의 시처럼 부드러웠고 승전가처럼 확신에 넘쳤다. '어느 날 아침 다카르는 슬프고도 불확실하게 깨어난다. 그러나 보라, 떠오르는 태양이 수백대 전함과 수송선, 거대한 함대로 뒤덮인 수평선을 비추는 것을 그곳 사람들은 보게 되리라.'

그는 국가와 국민을 역사공동체로 몰아넣었다. 그는 영국인들이 그들의 역사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계대전이라는 시련을 '우리 선조들도 겪었던 고통과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국민 스스로 대영제국 역사 한 가운데 서있음을 깨닫게 했다. 처칠은 노련했다. 글을 고치고 다듬었다. 명분과 이유는 충분했다. '싸우자. 승리하자' 처칠을 중심으로 뭉친 영국민의 충성심이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 승전가를 울렸다.

처칠은 2차 세계대전 후 회고록을 집필해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처칠 회고록'은 전쟁 기간에 쓴 편지와 수필로 이루어졌다. 200만 단어가 넘는 분량이다. 노벨문학상 최종 후보에 아이슬란드 작가 할도 락스네스와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영국 소설가 윌터 데라메어가 올랐다. 당초 스웨덴 한림원 심사위원들은 정치가 처칠에게 노벨상 수여를 망설였다. 노벨상이 정치적 의미로 해석될까 염려했다. 한림원 사무총장 안데르스 외스털링은 그의 회고록에 쓰인 글은 문학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과 처칠이 1946년부터 매년 후보에 올랐던 점을 상기시켰다. 처칠은 혀와 펜으로 평생 먹고 살 돈을 벌었을뿐 아니라 영국의 명예까지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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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남서울대 겸임교수 ssonn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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