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해 유럽으로 가는 여객선 안, 조선 학생과 안남 학생이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전혀 다른 언어로, 의사소통이 막막한 상황이었다. 누군가 펜을 꺼내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색함은 사라지고 교류의 장이 활짝 펼쳐졌다. 재독 소설가 이미륵의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한 장면이다.
안남은 중국에서 베트남을 칭하던 옛 이름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같은 한자 문화권으로 엮여 있어 조선 시대에도 양국 사신이 필담으로 대화를 나눴다. 문화가 서로 유사한 감수성을 공유해서일까. 17세기 조선 문인의 시가 베트남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다는 이야기는 지금 베트남에서 유행하는 K팝을 떠올리게 한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 아니다 하더라도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국가들이 북미나 유럽보다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지리상으로도 가깝고 식민 지배 아픔이라는 역사를 경험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아세안 경제 성장도 여러모로 한강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
한강의 기적은 메콩강의 기적을 끌어낼 수 있을까. 오는 25일부터 부산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는 한·아세안 대화 관계 수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다. 이번이 벌써 한국에서 열리는 세 번째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다. 이처럼 한국 정부는 일찍이 아세안 시장에 주목하고 신남방정책을 통해 아세안 국가에 공을 들여 왔다. 그동안 아세안은 중국에 이어 우리나라 제2의 교역 대상으로 성장했다. 한국과 아세안은 명실상부 떼려야 뗄 수 없는 경제 동반자 관계가 됐다.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기간에 중소벤처기업부가 주최하는 '한·아세안 스타트업 엑스포·컴업 2019'도 한·아세안 간 스타트업 연대를 통해 공동 번영을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특히 올해 처음 열리는 '컴업2019'는 한국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 기회를 제공하고, 세계 스타트업을 한국에 소개하는 행사다. 앞으로 핀란드 '슬러시' 못지않은 대표 글로벌 스타트업 축제로 성장, 아세안에 한국 혁신 창업 롤모델을 제시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근무하는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에도 올 한 해 태국, 베트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아세안 방문객이 많았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 지역의 우수한 정보통신기술(ICT) 인프라를 바탕으로 4차 산업혁명 분야 혁신 기업을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서다. 글로벌 진출과 투자 유치를 지원하는 경기혁신센터 보육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하기 위한 발길도 이어졌다. 경기혁신센터도 지난 8월 태국 디지털경제진흥원(DEPA)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한·아세안 ICT 스타트업 지원과 육성을 위한 교류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경기혁신센터는 한아세안센터와 공동으로 오는 28일까지 '2019 한·아세안 스타트업위크'를 진행한다. 한·아세안 간 상호 호혜의 투자 환경 조성과 기술 기반의 창업 생태계 교류 활성화를 위해서다. 아세안 11개국 정부 관계자 및 스타트업 유관 기관, 스타트업 40개사 등의 관계자 250명이 한국을 찾는다. 우리나라 창업 생태 및 지원 제도, 글로벌 진출전략을 전수받는다. 20일에는 판교에서 '한·아세안 ICT스타트업 투자활성화세미나', 21일에는 '한·아세안 스타트업교류세미나 데모데이'가 열릴 예정이다.
경기혁신센터는 국내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해외 스타트업의 국내 정착 지원 및 스케일업 경험을 바탕으로 아세안 스타트업 역량 강화를 위해 적극 지원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는 한·아세안 스타트업 간 단순 교류를 넘어 ICT 강국 한국의 혁신 성장 모델을 전수, 아세안 전체의 균형 있는 혁신 성장을 도모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이 한·아세안 공동 번영의 미래를 여는 중심이 되기를 바란다.
이경준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센터장 kyungjoon.lee@cce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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