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출규제와 화이트 리스트 제외 조치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국산화가 시급한 국가적 과제가 됐고 또 절실해졌다. 그러나 일본과의 기술 전쟁이라는 관점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며 동북아 기술 패권이라는 관점에서 중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다시 보고 이에 대한 우리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더군다나 중국은 시진핑 주석의 주도하에 이른바 '과학기술 굴기'로 이미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의 주요 분야에서 우리를 앞질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은 주요 핵심 분야에서 양국 간 기술교류를 지속적해서 강화해오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류지영이 만난 사람]은 한∙일 기술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 동북아의 기술 패권 경쟁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중국 과학기술 전문가인 LG 화학의 김성구 박사를 만나 보았다. 김성구 박사는 중국 칭화대에서 화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 동경공업대학의 방문학자를 거처 LG화학 기술연구원에서 소재개발 연구를 하고 있는 등 한∙중∙일에서의 연구개발 경력을 가지고 있다.
- 한국의 반도체 분야를 위시한 기술 산업이 위기인가? 위기라면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 위기로 보인다. 하지만 위기는 또 다른 기회가 아닐까? 이러한 위기를 재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의 국가 경쟁력은 언제나 과학기술 경쟁력에서 시작됐다. 실제로 미국은 기술 노동자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며, 이번에 수출규제로 문제가 된 일본도 100년이 넘는 장인정신에 근간한 기술 경쟁력을 자랑한다. 반면에 우리는 과거부터 기술자를 '쟁이'로 폄하한 측면이 있었고, 현재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야기된 한∙일간 기술전쟁 이전에 이공계 기피 현상, R&D의 양극화, 과학기술 정책 및 기술기획 평가 시스템의 후진성, 연구 예산의 비효율적 집행 등 많은 문제들이 이미 표면화
됐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이 기회를 반면교사 삼아 기술개발을 위한 제도적 혁신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아울러 한국을 떠나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욕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연구 환경을 먼저 살펴봤으면 한다. 또한 자유로운 토론이 아닌 권위적인 지시, 실험실 출신 배경을 토대로 한 기득권 지키기 등의 후진적 문화는 창의적인 기술개발을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심각한 R&D 양극화를 촉발시킬 수 있다. 편견 없이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창의가 존중받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 때 우리나라 기술 혁신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과학기술 산업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면?
▲ ‘현상’에 주목하지 않고,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기존의 연구 기획 평가 시스템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재구성해야 한다. 우리의 GDP 대비 연구비 예산의 상대적 지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세계 과학기술 성과 인용 지표를 보면 그렇지 않다. 상대적으로 예산지원이 많은 것과 과학기술 경쟁력이 높은 것은 매우 다르다. 접근방식에 문제가 있다. 과학기술 성과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절대적 평가의 관점으로 과학기술의 수준과 현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첨단 소재 전쟁은 비단 한∙일간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본다. 중국과의 문제도 중요하다. 중국은 화학공학과 출신인 시진핑 주석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과학기술에 대한 대대적인 정책 지원을 시행하고 있다. 일본은 불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이러한 중국의 정책 인프라를 잘 활용하여 중국과의 과학기술 교류를 활성화시켜 왔다. 일례로 중국과 일본은 서로를 오가며 2년마다 규제 대상 품목인 ‘폴리이미드 기술 교류회’를 개최하고 있다. 우리도 그간 소홀했던 대(對) 중국 과학기술 교류에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본다. 더 늦으면 동북아 과학기술 패권 전쟁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있다.
- 결국 한∙일 기술 전쟁에서 한∙중∙일 동북아 기술 패권전쟁으로 시야를 넓혀야 할 것 같다.
▲ 일본은 첨단소재 분야에서 100년 이상의 아날로그적인 연구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기술 노하우의 축적이 매우 의미 있는 첨단 소재 시장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제조업 중심의 패스트 팔로워 전략으로 성장해왔다. 따라서 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 노력이 많이 드는 소재 분야 보다는 소재를 이용한 제조가 더 효율적이었다. 세계 1위의 메모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가 그러한 과정의 산물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러한 두 가지 방식 모두를 흡수하려 한다. 제조업 굴기가 그것이다. 그 예는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은 한국 평판 디스플레이 수입으로 인한 적자와 내수 시장의 과잉공급으로 인한 가격 하락 그리고 생산 수율의 저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A급 제품만 팔려나가지 않는 시장이 중국 시장이기에 중국산 B급, C급의 패널로 인민들의 텔레비전을 만들어 보급하면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기술력을 축적하였다.
또한 '천인계획'이라고 하는 대규모 기술인력자원 확보 정책과 중앙정부의 정책을 적극 지원하는 지방 정부의 협조로 많은 엔지니어들을 집중 양성했고 수많은 벤처기업 창업을 지원하였다. 못 만드는 제품이 없다던 기존의 기술 복제 경험은 이러한 벤처기업과 시너지를 내면서 신기술과 제품을 만들었다. ‘대륙의 실수’라 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고…
중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은 2017년을 기점으로 우리와 동등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른바 '과학기술 인해전술'로 성장 속도가 매우 빨랐으며 이제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차산업 혁명의 아이템인 5G와 안면인식 기술, 양자통신, 항공우주기술 등은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 우리는 중국의 기술경쟁력에 의구심을 품기도 한다. 복제품, 품질 문제 등에 대한 견해는?
▲ 중국은 달라졌다. 변화의 시기에서 성숙의 시기로 발전하고 있다. 과거 5년에서 10년 정도는 복제에 대한 이슈를 벗어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성장통으로 여긴다. 중국 제조업은 과거 필요한 재료 구매 시 한국이나 일본의 레퍼런스가 있던 소재는 묻지 않고 사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각각의 기술적 스팩을 꼼꼼히 따져보고 구매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각종 성능에 대한 표준을 세우고 스스로의 개발품을 셋업해 나가고 있다. 복제품, 품질 문제에도 스스로 엄격해지고 있다. 마이크로 단위 볼펜심의 개발을 보란 듯이 내놓으며 ‘제조2025’ 정책을 추진해 나간다. 중국에서 개최되는 세미나 또는 학술대회에 참석해보면 과거와 달리 높아진 그들의 수준에 놀라게 된다. 그만큼 노력하고 또 질문을 던지며 극복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 중국 과학기술 굴기의 우리에 대한 위협이 점차 가시화되는 듯하다.
▲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제1의 무역 수출국은 중국이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최고의 고객이다. 따라서 중국 의존도가 높다고, 탈중국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탈중국이 아닌 다국적 수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반대로 중국 입장에서 대한민국은 최악의 수입국가이다. 수입국 중에 대만을 제외한 최고의 무역 적자국이다. 그중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수입 의존도가 가장 높은 종목이다. 반도체는 기술이 매우 어려워 시간이 필요하고, 기술 노하우가 필요하며 막대한 비용도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디스플레이가 오히려 반도체보다는 수월하다. 중국 입장에서 디스플레이 수입량을 내수화한다면 대중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뿐 아니라, 수입 적자도 해결하고, 취업난도 개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디스플레이 사업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방 한 도시의 10.5세대 패널공장의 지분을 살펴보면 정부 관련 자금이 90% 이상이다. 이를 실제 사기업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성장 속도는 매우 빠르다. 결국 LG디스플레이의 LCD는 중국 BOE에 1위 자리를 내어 주었고, 이후 삼성과 함께 사업 감축과 인원 축소를 실시했다.
- 향후 중국 첨단소재 산업 굴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 전략은?
중국의 내수시장은 곧 1경원 규모로 확대될 것이다. 중국 과기부의 기반기술(기초, 원천) 분야의 국가연구개발 프로젝트인 ‘973 계획’은 매년 100 여건의 대규모 과제로 진행되고, ‘13.5 규획’으로 5년마다 과학기술 프로젝트를 평가하고 새로운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4차산업 분야에서도 세계 10대 핀테크 기업 중에 6개가 중국 기업이며, 인공지능 관련 논문은 미국과도 1, 2위를 다투고 있는 등 과학기술 혁신에서 이미 우리보다 한 발 앞서고 있다.
2020년과 2050년에 맞춰진 ‘중화부흥’에 대한 우리의 전략적 대응을 위해 중국 과기 정책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외부 부처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 조직 구축을 제안한다. 아울러 한∙중 국가 정상회담이 개최될 때에도 국익에 영향을 미칠 과학기술 협력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 중국의 첨단산업은 OEM에서 시장을 주도할 소재 내수화에 이미 착수했다. 중국의 국무원, 개발개혁위, 과기부 등 중앙정부 각 부처에서 매우 많은 전략적 과기 핵심 정책과 그에 따른 세부적 시행규칙이 연이어 발표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이 늦어진다면 우리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 외에도 세계 시장에서의 입지가 크게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류지영 전자신문인터넷 기자 (thankyo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