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는 최근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특강에서 “나로부터의 혁신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와 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는 “연구원들은 생각하는 독립적 주체로서 질문과 지적 사유로부터 창의성이 솟아나고 이를 통해 진정한 과학 혁신이 가능해진다”고 강조해 필자와 직원들의 깊은 공감을 이끌었다.
최근 일본의 한국 전략물자 수출 규제와 화이트리스트 제외로 우리나라 경제에 끼칠 파장이 우려되는 가운데 정부와 업계를 중심으로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핵심기술 국산화 등 그 해결방안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다행인 것은 이번 기회를 통해 국가적 차원에서 기술안보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 기회가 됐다는 것이다. 일본의 기술 우위에 근거한 경제전쟁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이 그동안 잊고 지낸 국가적 사명감과 연구개발(R&D) 의지를 자극하는 긍정적 효과도 가져왔다. 필자는 이런 변화를 지켜보며 그동안 반복된 구호성 혁신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의 연구현장이 진정한 혁신의 모멘텀을 확보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도 이번 기회를 통해 대한민국 연구현장이 R&D 핵심가치이자 기본정신인 자율 의지에 기반을 둔 창의와 도전정신을 회복하고, 이것이 기본 문화가 되는 환경을 반드시 구축해야 한다. 국가 R&D 중추인 정부출연 연구원이 미션 중심의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현장에 창의와 도전정신이 마음껏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현재 우리의 R&D 현장에서는 과연 어느 정도의 자율과 창의성, 도전정신이 발현되고 있는지를 겸허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세계 최고의 기술 강국인 독일은 어떤가. 지난 2001~2003년 프라운호퍼연구회 등 과학기술계 주요 인사들은 자국 과학기술을 염려하는 많은 질문과 우려를 쏟아냈다. 이에 독일 정부는 수년 간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독일 과학기술 위기의 본질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 힘든 구조적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아이디어는 더 많은 자유로부터!' 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후 2006년에는 범부처 합동 전략으로 '독일첨단기술전략'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겨 문제를 해결했고, 이후 '인더스트리 4.0 프로젝트' 로 4차 산업혁명 글로벌 주도권을 선점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 초부터 독일과 유사한 우려들이 제기돼 왔지만 20년째 같은 질문을 반복되고 있다. 국가성장에 핵심동력이 되는 원천·요소 기술 개발에는 오랜 시간 '실패 경험'이 축적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도전적 연구보다 성과를 포장하기 쉬운 과제만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 이번 기회에 연구현장의 자율과 창의를 막는 관리 중심의 각종 규제와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연구자들이 도전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혁신 리더십을 정립해야 한다.
또 이번 기회에 기업과 대학, 국가연구소 간 R&D 협업시스템을 반드시 완성시켜야 한다. 최근 소재·부품·장비산업 육성과 관련한 각종 보도와 토론회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제기된 핵심 키워드도 대기업, 중소·중견기업 또는 기업-대학-연구소의 '유기적인 협업'과 '협력체계 구축'이다. 첨단기술 개발을 위한 치열한 국제경쟁 체제에서 기업-대학-연구소가 협력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나라의 협력주체들은 파편화, 사일로(silo)화 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은 세계 10위권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50여년간 정치, 사회, 경제, 과학기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둬 왔다. 우리는 이번 한일 갈등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R&D 시스템과 환경을 제대로 정비하고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세계 최고로 올려놓을 마지막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 최근 김성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혁신본부장이 한일 분쟁 관련 전략기술 확보를 위한 브리핑에서 “이번에야말로 과학기술이, 과학기술인이 확실하게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 이는 과학기술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울먹이던 '눈물의 의미'를 과학기술인들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김복철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원장 kbc@kiga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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