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 처리를 강행하면서 국내 산업계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수출규제 대상 품목이 1194개로 확대되면서 전자, 소재부품, 자동차, 통신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파장이 예상된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미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를 어느 정도 예상했던 만큼 당황하기보다는 그동안 준비해온 대책을 차질 없이 추진하는데 주력하는 분위기다.
전자업계는 가장 큰 피해가 예상되는 분야 중 하나다. 이미 핵심소재 3종 수출규제로 피해를 입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계는 2차 피해가 예상된다. 일본이 향후 반도체 생산에 핵심적인 실리콘 웨이퍼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요한 블랭크 마스크 등의 수출을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 석판인쇄장비 등 반도체 장비, 다층막 헤테로적층 기판 등 반도체 재료도 규제 대상 품목이다.
전자제품에 사용되는 이미지센서와 각종 센서 등 부품, 특수필름 등도 일본 의존도가 높다.
업계는 그동안 대응 준비를 해온 만큼 생산 차질 등 피해를 줄이는 데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삼성전자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사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대체 소재 발굴과 생산 조절 등으로 대응할 방침이다.
전자업계도 수출규제 조치가 시행되기 이전에 충분한 재고 확보 등으로 피해를 줄이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LG전자는 지난달 말 일본에 있는 협력회사 전체를 대상으로 안전재고를 확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향후에도 공급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달라고 했다. 국내 협력사 가운데 일본에서 소재와 부품을 들여와 LG전자에 공급하는 회사에도 동일한 내용을 요청했다.
LG전자 관계자는 “상황이 장기화될 가능성에 철처히 대비해 거래처와 고객에게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소재·부품 업계는 탈일본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4대 핵심소재 가운데 하나인 분리막을 자체 개발해 조달하고 있다. LG화학과 삼성SDI는 일본산 비중을 낮추고 국산과 중국산 물량을 늘렸다.
국내 최대 규모 불화수소 생산 업체인 솔브레인은 이미 고순도 불화수소 국산화 작업에 들어갔다. 일본 반도체 공정 업체 고쿠사이 일렉트릭, 에바라, 시바우라, 디스코 등과 경쟁하는 원익IPS, 케이씨텍, 이오테크닉스 등도 마찬가지다.
물론 우려도 나온다. 일본산 비중이 절대적인 실리콘 웨이퍼, 이미지 센서, 메탈 마스크, 분리막 등 4대 소재 부품은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용석 한국화학연구원 고기능고분자연구센터장은 “실리콘 웨이퍼는 일본 기업이 세계 시장점유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면서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면 웨이퍼로 만드는 국내 반도체 집적회로(IC)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말했다.
화학업계도 중간 원료와 소재 거래처 다변화에 애로를 겪고 있다. 특히 공급업체에 바뀐 원료로 생산하겠다는 PCN 승인을 받는 기간이 1년을 넘길 수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기타석유화학 중간원료는 대일본 수출액 의존도가 99%에 육박한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대체원료를 찾는다 해도 승인 받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공장이 멈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자동차 업계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전자·반도체 산업에 비해 부품 의존도가 낮지만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 공작기계 부품 등 일부 공급선을 교체해야 하는 것은 물론 규제 품목이 확대될 조짐이 감지되면서다.
KB증권은 “올해 들어 5월까지 일본산 부품 수입액은 3억1000만달러로 국내 자동차 생산(163억달러) 대비 1.9%에 그쳤다”면서 “당분간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진단했다.
문제는 일본의 추가 수출규제가 수소전기차나 자율주행차 등 미래형 자동차 분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변속기를 비롯해 공작기계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수치제어반(CNC), 고전압 콘덴서 등을 비롯해 수소전기차 탱크용 탄소섬유와 수소연료전지택 전해질막 등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친환경차 위주로 일본산 소재 수급 불안정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국내 완성차 업체 관계자는 “일본 부품은 공작기계 부품 등 일부여서 당장은 크게 문제될 게 없다”면서도 “친환경, 미래차 부품으로 수출 규제 범위가 늘고 있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한국자동차산업협회와 현대차그룹 등은 이번 사태에 대해 별다른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국가 차원의 일관된 대응책에 보조를 맞추기 위한 판단으로 풀이된다.
통신 분야는 직접적 타격보다 간접 피해가 예상된다.
통신장비는 일본이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결정한 전략물자 중 비민감품목 857개에 포함됐다. 기존 3년에서 6개월 만에 수출허가를 받아야 하는 품목이 됐지만 우리나라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이동통신사는 현재 5G, LTE 등 주요 유무선 네트워크에 일본산 장비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통신분야 역시 반도체 핵심소재 수입이 차질을 빚을 경우, 생산 지연 등 간접적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스마트폰의 경우 불화수소 등 핵심소재 공급 지연으로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생산 차질이 예상된다. 장기화되면 완성품 생산 지연을 피하기 어렵다. 5G 기지국은 물론, 중계기, 광전송장비 역시 반도체가 핵심 부품이다.
다만 정부는 통신 분야에서도 장기적이고 간접적 피해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전반적으로 일본 의존도가 낮고 대체 가능한 소재·부품 위주라고 분석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는 “일본 통신 분야 수출제품 화이트리스트에도 일부 부품 소재가 포함됐지만, 정부는 대부분 대체가 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다”면서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권건호 전자산업 전문기자 wingh1@etnews.com, 류태웅기자 bigheroryu@etnews.com, 박지성기자 jisung@etnews.com, 박태준 자동차 전문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