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의료 데이터 패권 전쟁이 한창이지만 국내는 오히려 '데이터 장벽'을 쌓고 있다. 처벌에 대한 불안감과 데이터 가치가 높아지면서 자산으로 보호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세계 추세에 역행, 스스로 장벽을 쌓는 국내 현실에 규제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이 주관한 '제8차 ICT CEO 포럼'에서는 병원, 기업이 국내 의료 데이터 활용 현황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면서 정부 정책·제도 개선 지원을 요청했다.
최근 의료는 임상, 유전체, 생활습관 정보 등 다양한 데이터에 기반해 개인 맞춤형 치료를 구현하는 정밀의학을 지향한다. 각종 건강정보로 다양한 솔루션, 서비스가 탄생해 보건의료 산업 '원유'로 데이터 가치가 높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강력한 개인정보보호 법규에 따라 사실상 개인 동의 없이는 의료 데이터를 활용할 수 없다. 연구 목적으로 병원과 기업은 비식별 정보 활용이 확대되는데 이마저도 최근에는 보수적으로 바뀌었다.
김현준 뷰노 이사는 “4년 전 창업 초기에는 오히려 병원과 데이터 공유도 활발하고 협력을 많이 했다”면서 “최근 병원이 데이터를 자산으로 인지하면서 협력 채널을 줄이며, 시민사회단체도 기업이 데이터를 갖고 있는 것을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해 운신의 폭이 좁다”고 말했다.
박정탁 세브란스병원 데이터사이언스ICT센터 소장은 “개인정보보호법을 어떻게 해석할지가 관건인데, 아직까지 국내 병원 중 위반 사례가 없어 데이터 활용과 공유에 명확한 기준을 세우기 어렵다”면서 “의료정보를 활용해 산업화가 됐더라도 만약 정보를 제공한 환자가 소유권 혹은 인센티브를 요구한다면 마땅한 대응 방법이 없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미국은 자국 내 의료 데이터 수집·활용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 각국 데이터를 자유롭게 이동하자고 주장까지 한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대형 IT기업을 보유한 미국이 세계 데이터 패권을 노린다. 우리나라도 패권 경쟁에 동참할 무기를 만들어야 하지만 오히려 데이터를 품고만 있는 상황이다.
황희 이지케어텍 부사장은 “병원은 개인정보가 가진 위험 요소는 최소화하면서 이득에 대한 주도권은 놓치고 싶지 않아 데이터를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게 사실”이라면서 “특히 미국 주도로 논의 중인 국가 간 자유로운 데이터 이동이 올해나 내년 중에는 구체화될 가능성이 높은데, 국내에서 사용조차 어려웠던 데이터를 애플 등 글로벌 기업이 사용하도록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겨 대응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의료 데이터 활용 기준과 제한 등을 명확히 명시한 제도, 가이드라인 제·개정이 필요하다. 병원이 데이터 장벽을 치고 내부 전투만 준비하다가는 데이터 주권 자체가 위협 받는다.
이상헌 고대의료원 P-HIS사업단장은 “현재는 병원이 제공한 정보를 기업이 다르게 사용했을 때 병원까지 불이익을 당하는 구조여서 데이터를 보수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면서 “교통사고특례법처럼 건강정보기본법 등을 신설해 합당하게 데이터를 제공했을 경우 문제가 생기더라도 처벌을 최소화하는 제도가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김창용 NIPA 원장은 “데이터를 활용한 헬스케어 시장은 연평균 20%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유망한 영역”이라면서 “국내에서는 유망한 데이터가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있는데,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겠다”고 답했다.
정용철 의료/바이오 전문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