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글로벌 초일류기술개발(G-퍼스트) 사업'으로 세계 시장 판 흔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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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그동안 선진 기술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약간의 공정 변화를 통해 1등을 따라잡는 '추격자(패스트 팔로어)' 전략을 펼치면서 고도 경제 성장을 구가했다. 그 결과 세계 메모리 반도체의 절반 이상이 한국에서 생산되고, 주요 산유국이 아님에도 세계 4위의 석유화학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됐다. 또 가전, 휴대폰, 조선, 자동차 등 산업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한다.

그러나 추격자는 아무리 빨라도 선도자가 누리는 막강한 시장 지배력을 넘보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원천 기술을 해외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 한계다. 원천 기술 확보가 안 되면 선진국 종속 형태의 산업 구조로 고착화될 위험성이 크다. 이제는 '선도자(퍼스트 무버)'로서 원천 기술을 개발하고 고도의 질 내실화에 집중해야 한다.

원천 기술 개발이 결코 쉬운 건 아니다. 장기간 연구와 막대한 투자비가 소요되는 반면에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초기개발 단계에서부터 임계점을 넘을 때까지 정부의 적극 지원과 역할이다.

미국이 산업의 원천 기술 분야에서 앞설 수 있게 된 이유는 창의성과 도전성 강한 연구 활동을 정부가 전폭 독려한 덕분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 등장한 컴퓨터, 반도체, 인터넷 등 신기술은 냉전 시대에 옛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에 충격 받은 미국이 국방 관련 분야에서 고위험도 혁신 연구를 집중 지원한 결과 터져 나온 성과물이었다. 미국의 이 같은 연구개발(R&D) 정책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온 다양한 첨단 신기술의 상용화를 앞당겼다. 군사 기술로 개발됐지만 선박 항해, 자동차 내비게이션, 휴대폰 등 산업에 널리 쓰이는 위성항법장치(GPS) 기술이 대표 사례다.

우리 정부는 연간 20조원에 이르는 R&D 자금을 쏟아 부으며 신기술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전히 추격자형 R&D 환경에 머물고 있다. 이제는 GPS 같은 핵심 원천 기술 개발을 목표로 남보다 앞서 나가도록 창의성과 도전성 강한 선도자형 R&D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손잡고 발표한 중장기 대형 R&D 프로젝트 '글로벌 초일류기술개발(G-퍼스트) 사업'은 국내 R&D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 준다. G-퍼스트 사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천·핵심 기술 확보를 위해 2021~2035년 총 2조4436억원을 대학·연구소에 지원한다. 단계별 차등 지원책과 부처 간 연계 활동, 원천 기술 확보 이후 각자 역할까지 계획이 세세하게 담겼다. 특히 단기성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모처럼 큰 그림을 그려 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변화다.

이 같은 대규모 R&D 투자는 1개 기업이나 연구소에서 추진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 기업은 수익을 추구해야 되기 때문에 적극 나서서 투자할 수 없지만 국가는 다르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일본 등 기술 선진국도 기술·사회·경제 전반에 걸친 파급 효과가 매우 큰 원천 기술 확보를 목표로 주로 국가가 주도해서 중·장기 대형 R&D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우리나라도 R&D 투자와 지원 방식을 바꿀 때다.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혹 잘못된 것이 나와도 지나치게 책임을 묻는다면 연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정부 부처와 관리 기관의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 원천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면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이동통신 산업도 점점 세계 시장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된다는 신념으로 한 단계씩 전의를 다지며 도전했을 때 세계 시장의 판을 뒤흔들 만한 큰 성과도 나오는 법이다. 우리나라 R&D 분야의 새 도전인 글로벌 초일류 기술 개발 사업으로 GPS 같은 기술이 순수한 우리 기술로 개발될 날을 기대해 본다.

이기준 전 서울대 총장 kijun3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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