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일본 간 수산물 수입 규제를 놓고 빚어진 분쟁에서 우리 손을 들어 준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상소기구 위원의 임기 만료에 따라 신규 선임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6일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WTO 상소기구 위원 7명 가운데 네 자리가 공석이다. 나머지 3명 가운데 2명의 임기는 올해 만료된다.
오는 12월 미국의 토머스 그레이엄 위원과 인도의 우잘 싱 바티아 위원이 임기를 마친다. 두 명이 임기를 마치면 상소기구에는 중국 출신인 자오훙 위원 한 명만이 자리를 지키게 된다. 최소 세 명이 참석해야 하는 상소기구 특성상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WTO 상소기구가 '개점 폐업' 위기에 몰린 것은 미국의 신규 위원 선임 반대가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미국은 줄곧 WTO 상소기구가 협정에 부여된 역할을 넘어 '월권'을 행사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WTO 협정문은 정치적 합의를 통해 해석이 모호한 상태로 남겨뒀지만 상소기구 위원이 이를 법률적으로 명확히 판단하려 하면서 월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미국 측 입장이다.
정부 관계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한 이후 상소기구 위원 임기가 만료돼도 미국 정부의 반대로 새 위원을 뽑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자가 참여하는 국제기구 특성상 한 나라가 반대하면 위원을 선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김현종 현 국가안보실 2차장이 지난 2017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자리로 옮기면서 공석이 된 자리도 여전히 비어 있다.
최근 상소기구에서 수산물 수입 규제로 패소한 일본도 상소기구 운영과 관련해 미국에 동조하면서 상소기구 위원 선임은 더욱 난항을 겪고 있다. 우리 정부는 매년 국가 간 분쟁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역 분쟁이 더 첨예해질 것으로 보고 상소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WTO 협정상 상소기구 운영에는 최소 세 명의 위원이 필요하다”면서 “상소기구 구성 자체가 이뤄지지 못해 운영할 수 없고, 그 결과 WTO 분쟁 해결 절차가 붕괴되면 결국 국가 간 무역 분쟁이 생겨도 해결할 수 없거나 힘 있는 국가에 휘둘리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경민 산업정책(세종)전문 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