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시스템반도체, 다시 쓰는 반도체 신화

“우리나라가 반도체 강국이 아니라고요? 뉴스를 보면 우리나라 기업이 세계 1, 2위를 하고 있다는데요.”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면 흔히 듣는 말이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메모리반도체 강국이긴 하지만 시스템반도체 약소국이다.

반도체 산업은 크게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반도체와 데이터를 처리하는 시스템반도체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D램, 낸드플래시 같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독보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 같은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는 10년 이상 시장점유율 3%, 대기업을 제외하면 1% 수준에 그친 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업계와 정부의 노력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벤처 붐을 타고 2000년을 전후로 시스템반도체 창업이 많았다. 정부도 1990년대 말부터 '시스템반도체 2010 사업' '시스템반도체 2015 사업' 등을 통해 지원하고 DDI(디스플레이구동칩), CIS(이미지센서) 등 국산 제품이 개발됐다. 우리나라 시스템반도체 산업 저변을 확대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필자가 해당 부서 담당 과장으로 있던 2000년대 중·후반, 국산 시스템반도체가 해외 제품을 대체하게 된 것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글로벌 수준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기업 제품을 제외하면 세계 시장에서 내로라할 만한 것이 거의 없고, 꾸준히 이익을 내고 있는 기업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우리는 어렵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메모리 분야 호황에 가려져 있지만 시스템반도체 산업은 메모리반도체 산업보다 1.5배 이상 큰 거대 시장이다. 그리고 컴퓨터·휴대폰 등 최신 정보기술(IT) 기기에서부터 냉장고·밥솥 같은 생활가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는 다품종 산업으로, 경기 변동에 비해 안정되기도 하다. 또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빅데이터 등 이른바 4차 산업혁명 구현을 위한 핵심 부품으로,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 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을 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미래를 위해 하루빨리 붙잡아야 할 시장이다. 더욱이 산업 융합으로 신시장과 신제품이 등장하고, 메모리반도체 슈퍼사이클로 기업의 투자 여력이 확보된 지금이 우리에게 시장 진입을 위한 절호의 기회다.

정부는 최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시스템반도체 비전 및 전략을 논의했다. 시스템반도체 산업 육성을 통해 2030년까지 진정한 반도체 강국이 되겠다는 비전이다. 과거와 차별화되는 의미 있는 대책이다. 먼저 자동차 등 수요 대기업과 반도체 기업 간 얼라이언스를 구축하고 전기·가스 등 에너지검침인프라(AMI)와 같은 공공 수요를 발굴해서 기업들이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을 확대해 나간다. 설계 전문 기업인 팹리스 창업과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1000억원 규모의 전용 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그동안 단절돼 있는 팹리스(설계업체)와 파운드리(생산업체) 간 연계를 강화, 이른바 산업 생태계가 활성화되도록 노력한다. 시스템반도체는 설계 능력이 핵심인 만큼 주요 대학에 채용 연계형 계약학과를 신설하고, 시스템반도체 특화 교육 등을 제공해 2030년까지 고급 전문 인력 1만7000명 이상을 양성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향후 10년 동안 범부처 차원에서 1조원 이상을 투자, 미래 기술을 선제 개발해 나가는 계획도 빼놓지 않았다. 이에 발맞춰 대기업이 상생 협력에 노력하고 2030년까지 133조원 이상의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환경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문명의 양태가 결정된다고 설파했다. 5세대(5G) 이동통신, 자율주행차, 에지컴퓨팅 등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환경 변화에 어떻게 응전하는가에 따라 우리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바뀌고, 국가 경쟁력이 좌우될 것이다. 1980년대에 당시 일본이 차지하고 있던 메모리반도체 선진국 지위를 우리나라가 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시장을 개척하고, 기술을 혁신하며, 긴밀한 민·관 협업을 통해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제패했다. 끝없는 도전을 통해 시스템반도체 산업에서도 대한민국의 반도체 신화를 다시 한 번 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승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cheongsi@motie.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