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이 금융권의 복지부동 관행에 혁신 서비스를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정부가 지정대리인 제도를 도입해 기반을 마련했지만 금융권이 각종 업무 절차 등을 이유로 업무 위탁을 차일피일 미루기 때문이다. 금융권과 정부의 무관심에 금융혁신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
20일 금융위원회 및 관련 업계에 따르면 9월 금융위가 지정한 지정대리인 9개 핀테크기업 가운데 단 한 개도 시범 서비스를 시작하지 못했다. 핀테크 기업에 핵심 업무를 위탁해야 할 금융회사가 저마다 핀테크 기업과의 위·수탁 계약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정대리인 제도는 혁신 금융서비스 제공을 위해 최소한 범위 내에서 금융사의 본질 업무 위탁을 허용한 제도다. 금융혁신지원특별법 제정에 앞서 핀테크 기업이 신속하게 혁신 금융 서비스를 개시할 수 있도록 했다. 금융혁신지원특별법 제정이 국회 논의 과정에서 미뤄지면서 법 제정 이전에라도 빠르게 사업을 개시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그러나 제도 시행 3개월이 지나도록 시범 서비스를 개시한 업체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지정대리인으로 선정된 한 핀테크 업체 관계자는 “위·수탁을 하기로 한 은행에서 핵심성과지표(KPI)로 잡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 체결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며 “지정대리인 지정을 추진한 부서와 현업 부서간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아 무작정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당초 금융위는 업무를 위탁할 금융회사를 확보한 핀테크기업을 대상으로 지정대리인으로 지정했다. 우리은행, 하나은행, 농협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과 카드사, 저축은행 등 기존 금융사가 지정대리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서비스 개시를 위해 적극 나서는 곳은 없다.
금융권이 소극적인 이유는 다양하다. 핀테크 기업이 금융회사로부터 업무를 위탁받아 서비스에 성공하더라도 성과가 회사 실적으로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회사 내부에서 여타 부서와 이해상충 문제도 발생한다. 보안성 심사, 금융권의 내부통제 등 통상 업무 절차 역시 핀테크 기업이 사업을 개시하는데 걸림돌이다.
한 금융권 디지털 담당 임원은 “각 금융사가 저마다 디지털 혁신을 위해 나서는 상황에서 회사가 직접 하지 못한 혁신을 핀테크 기업 손을 빌린다는게 부담”이라며 “임원급에서 통 큰 결정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쉽게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권 관계자도 “전통은행에서 핵심 후선업무에 대한 지원 인프라가 전무한 것이 사실”이라며 “지정대리인제가 도입됐지만 일선에선 제도 자체를 모르거나 여러 규제가 많다”고 말했다
이처럼 핀테크 기업과 금융회사간 위·수탁 계약이 차일피일 미뤄지며 금융위도 고민에 빠졌다. 이미 2차 모집을 실시, 15개 가량의 핀테크 기업이 몰렸지만 정작 1차 핀테크 기업의 연내 서비스 개시는 불투명하다. 금융위는 내년 상반기에야 위·수탁 계약을 마무리 짓는 기업이 등장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금융권의 참여가 기대만큼 빠르지 않다고 해서 금융사를 압박해서는 좋은 의도로 도입한 제도가 활성화되지 못할 수 있다”면서 “핀테크기업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장기 발전 방안을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핀테크 기업은 정부 차원에서 금융권의 적극 참여를 돌려할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핀테크 업체 관계자는 “각 금융권이 혁신 관련 KPI로 고민을 하고 있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지정대리인에 적극 참여하는 회사에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금융혁신지원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만큼 핀테크기업의 지속적인 혁신 서비스 제공을 위한 후속 조치도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업계 관계자는 “위탁 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서비스 지속 여부 등 제도상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며 “금융혁신법 시행령 마련 과정에서 핀테크 기업의 사업 연속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