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계가 잇따른 감사와 수장 이탈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수 기관장이 외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직을 내려놨다. 이번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권이 바뀌는 매 시기마다 '기관장 물갈이'가 거듭됐다. 기관장 조기 사임은 개인을 넘어 기관과 과기계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정치논리에 따른 기관장 압박과 사임 종용을 차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중도사임 과기계 기관장 11명 달해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과학기술계 기관장 11명이 중도 퇴임했다. 적게는 5개월, 많게는 2년 넘는 임기를 남기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구체화 시점은 지난해 말부터였다. 12월 한 달 동안에만 박태현 전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 황진택 에너지기술평가원 원장, 홍기훈 해양과학기술원(KIOST) 원장이 연달아 사임했다. 모두 일신상 이유를 들었지만 과기계에서는 '전 정권 지우기' 일환 아니냐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박태현 전 이사장은 박근혜 정권 말인 2016년 12월 임명된 인물이다. 황진택 전 원장은 전 정권의 산업부 장관자문관을 역임했고, 홍기훈 전 원장도 '친박' 인사로 거론됐다.
올해도 과학기술계 공공기관장과 정부출연연구원(출연연) 원장 사임이 이어졌다. 상반기에만 6명이다. 장규태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원장과 서상현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소장이 2월 사임했고, 3~4월에도 조무제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신중호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원장, 임기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원장, 성게용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원장이 자리를 떠났다. 상당수가 전 정권 선임 인사였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숨 고르기를 하듯 7개월 가까이 중도 사임 기관장이 나오지 않았지만 연말 들어 하재주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이 그동안 원자력연의 안전문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과학기술원'에서도 중도 사임…감사가 주된 압박 무기
최근에는 과기 인력의 산실인 과학기술원에서도 기관장 중도 사임 사태가 벌어졌다. 손상혁 전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장이 자신을 둘러싼 비위 행위 논란을 뒤로 하고 교정을 떠났다.
여파는 손상혁 전 총장 직전에 DGIST 총장을 역임한 신성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신 총장을 DGIST 총장재임 시 있었던 횡령과 배임 혐의로 검찰 고발하고, 이사회에 직무정지를 요청했다.
두 과기원 총장에 벌어진 일 역시 현 정권의 기관장 물갈이, 전 정권 지우기 작업의 일환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들이 거친 DGIST가 위치한 곳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기반인 대구다.
중도 사임 기관장 가운데 상당수는 직을 버리기 전 강도 높은 감사에 직면했다. 손 전 총장이 재임한 DGIST는 7~8월 한 달 사이 두 번이나 특정감사를 받았다. '표적감사'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과기정통부는 감사 결과 손 전 총장이 펠로 재임용 부당 지시를 비롯한 비위행위를 저지른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DGIST 이사회에 손 총장 징계를 요청했다. 이는 총장 자진 사퇴로 이어졌다. 과기정통부는 지난 DIGIST 감사에서 확인한 내용을 바탕으로 신성철 총장 역시 압박하고 있다.
◇정권마다 반복되는 '물갈이', 과기계 전반에 악영향
과기계 기관장 교체 논란은 이번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박근혜 정부 초기에는 이승종 연구재단 이사장, 최태인 기계연구원 원장, 박윤원 KINS 원장이 직을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 때는 정부가 교육과학기술부와 지식경제부 산하 32개 출연연에 기관장 사표 제출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전 정권에서 임명한 기관장과 해당 기관에 감사를 거듭했다.
과기계는 매 번 반복되는 기관장 교체 문제를 정권의 '논공행상'에 따른 그릇된 행보로 바라봤다. 정권과 손발이 맞는 인사를 기관장에 앉혀 기관 운영 효율을 배가 하는 목적도 있지만, 근저에는 정권 창출 공을 세운 인사에 보은해야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광오 공공연구노조 사무처장은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는 기관장 물갈이 사태는 결국 정권의 보은을 위해 벌어지는 일”이라며 “아주 그릇된 행태”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정부 행보가 기관장 개인뿐만 아니라 해당 기관과 전체 과기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무리한 감사 과정에서 비롯된 기관장 깎아내리기로 기관 위상이 추락한다. 사임으로 이어질 경우 차후 새로운 기관장이 오기까지 내부 업무 공백과 혼란도 생긴다. 과기계 전체 사기와 역량이 땅으로 떨어진다.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은 “최근 신성철 총장 사안을 비롯해 매 정권에서 벌어지는 기관장 감사나 자진 사퇴 사항을 보면 정부가 몰아가는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때가 많다”고 지적했다. 신 의원은 “과학기술은 정권이나 정치논리와 무관하게 가는 것이 맞다. 처음 선임할 때부터 적합한 인사를 선임하고 낙하산이나 줄서기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전체 과기계를 위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대전=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