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7일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은 한국원자력의학원, 기초과학연구원과 함께 자신들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협약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맺었다. 이 날 연구회는 출연연이 대학이나 기업과 구별된 공공성 또는 불확실성이 따르는 연구를 수행하되 수월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그 역할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출연연이 수행하는 연구 사업은 이런 역할과 책임은 다소 괴리가 있다. 무엇보다 3년 안팎의 소규모 사업이 많고, 연구는 개인 연구자 또는 소규모 팀 단위로 수행되는 경향도 있다. 융합연구를 말하지만 사실 연구비 경쟁 때문에 외부는커녕 내부 교류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마침 이들 출연연 역할과 책임을 설정했고, 정부도 연구과제중심제도(PBS) 개선뿐만 아니라 출연연 혁신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차제에 그 역할과 책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여건 마련이 따랐으면 한다. 현장의 목소리 가운데 몇 가지 경청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
첫째 출연연 조직 차원의 연구 역량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사실 출연연의 가장 큰 경쟁력은 숙련된 연구자들을 조직화된 연구 집단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장점을 살리려면 이같이 조직화된 연구 역량과 시너지가 발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출연연 역할을 분명히 하기 위해선 중장기 로드맵을 바탕으로 조직 기반의 유연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핵심 사업이 설계돼야 한다는 주장도 타당성이 있다.
둘째 연구 기획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연구개발(R&D) 사이클'의 종합된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대형 연구 사업 기획에서 출연연 역할이 감소, 미래 기획 기능과 역량도 약화됐다는 진단이 있다. 현재 우주나 원자력 같은 거대 공공 연구에 한정돼 있는 역할을 다른 주요 분야로 넓히는 한편 국가 차원 중장기 계획 수립에 일정 역할을 맡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와 함께 출연연도 이젠 10~20년 후 미래 기술뿐만 아니라 산업과 시장을 예측하고 전망하는 역량을 키워서 성과물을 보여야 한다. 기술이나 산업 전망을 국제기구나 해외 전문 기업에만 의존해야 하는 일은 앞으로 없어져야 한다.
셋째 연구회 기능과 역할도 다시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 우리 연구회 체제가 첫 모습을 갖춘 것은 1999년이다. 그때 과학기술 분야 출연연을 성격에 따라 기초기술연구회, 공공기술연구회, 산업기술연구회로 구분해 조직했다. 그 이후 환경 변화를 거치면서 지금 국가과학기술연구회로 통합됐지만 정작 지금 과기출연기관법 제21조에 밝힌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는 과학기술계가 온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듯하다.
원론일 수 있지만 정부는 큰 방향성을 제시하고 연구회가 그 수행 방안을 출연연과 마련해 정부와 협약하는 모습이 이상형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와 함께 융·복합 연구, 산·학·연 및 국제 협력, 우수 연구자 지원, 과학기술 인력의 재교육 및 훈련 역시 연구회와 출연연이 제격으로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고민하고 있는 재원 문제도 창의력을 발휘한 해결책이 있다고 본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처음 설립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출연연이 국가 산업 발전이나 국가 과학기술 혁신 체제 구축에 기여한 바 있음을 강조할 것도 없다. 지난 우리 정책이 과기 분야 출연연의 경영 합리화에 방점을 두었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을 수 있다. 단지 이것들을 지금 다시 따지는 대신 우리가 고민해야 할 중요한 것은 미래 출연연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오늘 무엇을 시작할 것인가에 있다. 우리 출연연이 지닌 연구 조직으로서의 가치와 잠재력을 우리 사회가 다시 한 번 더 신뢰할 때 과거 성공 신화가 미래에 다시 실현되리라 믿는다.
◇ET교수포럼 명단(가나다 순)=김현수(순천향대), 문주현(동국대), 박재민(건국대), 박호정(고려대), 송성진(성균관대), 오중산(숙명여대), 이우영(연세대), 이젬마(경희대), 이종수(서울대), 정도진(중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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