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연구개발(R&D)이 위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대통령 선거 후보 시절에 중소벤처기업부 신설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중소기업 전용 R&D 예산을 약 두 배 늘리겠다고 언급했다. 연대보증 폐지나 징벌성 손해배상 강화와 더불어 '문재인표 중기 공약'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중소기업 혁신 기조에 적신호가 켜진 듯하다. 언론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진행해 온 중기부의 R&D 사업 4개 가운데 1개만 예비타당성조사(예타) 과정을 통과하고 나머지는 다시 기획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다. 중기부의 핵심 R&D 사업 8개는 2020년에 종료될 예정이다.
혁신성장 정책의 핵심축이 돼야 하는 중기부도 출범 후 15개월이 넘었지만 아직 명확한 중장기 R&D 청사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자칫 중기 R&D가 휘청거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섞인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이런 상황의 많은 부분은 아무래도 주무 부처인 중기부 몫이겠다. 청에서 부로 승격한 이유가 중소기업청이 중소기업 정책을 담당하기는 했지만 법안을 발의할 수 없다는 점에 있은 만큼 미래 중기 R&D의 밑그림을 내놓고, 유관 부처를 설득하고 협력을 끌어내는 것은 커진 권한에 대한 책임이다.
물론 볼멘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혁신의 한계에 부닥친 중소기업이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는데도 너무 기존 잣대로 중기 R&D를 본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만큼 속히 내일의 해법을 제시해야 하겠다.
무엇보다 첫째는 부처와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는 것이다. 청에서 부처로 승격됐다고 R&D 기획 역량이 따라 커지는 것은 아닐 터다. 중기 R&D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머리를 내젓는 대신 부족한 기획 능력을 확보해야 하겠다. 기존의 인력 네트워크로 부족하다면 그런 창의력을 갖춘 전문가를 찾아 부족한 역량을 채워야 한다. 정부와 정책 서클에서 합의를 모으고 만들어 가는 것까지 이젠 중기부 몫이 된 셈이다.
둘째는 부처 간 협력 기반 조정 기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R&D 기획 경험이 가장 풍부하고 전문가를 가장 많이 보유한 부처가 평가자 역할을 하다 보면 자칫 너무 높은 문지방이 될 수 있다.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부분 최적화'는 될 수 있겠지만 이른바 '일반균형'을 찾기는 더 어려울 수 있다. 과학기술혁신본부의 실장급(1급) 직제나 2004년에 설치한 첫 과기혁신본부의 실장급 직제의 명칭을 공교롭게 모두 조정관이라 한 것에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는 작게 시작해서 성과를 봐 가며 보완하고 조정하는 이른바 '린(Lean) 방식'을 고려함 직하다. 자칫 R&D 사업이 초점을 잃고 방만해질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기술과 시장의 환경 변화가 극심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명확하고 완벽하게 설계하는 것도, 이 청사진에만 맞춰 운영하는 것도 어렵거나 진정한 성과 창출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 개략의 지도를 갖고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가는 것이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민간의 경험을 한번 고려할 때가 됐다고 본다.
결국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4차 산업혁명이라고 말하는 예전과 다른 세상에서 작동하는 중기 R&D 전략이다. 미래에는 더 이상 정해진 궤적을 따라가는 미사일이나 내가 한 구간을 뛰고 그다음 구간을 다른 주자에게 넘겨주는 이어달리기 방식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그 대신 어깨를 맞대고 스크럼을 짜야 하는 럭비의 팀플레이나 끝없이 펼쳐진 험난한 지평을 가로지르는 동안 수없는 기어 바꾸기를 해야 하는 다카랠리의 드라이버가 돼야 할지 모른다. 결국 중기 R&D 전략에 큰 숙제가 남은 셈이다.
◇ET교수포럼 명단(가나다 순)=김현수(순천향대), 문주현(동국대), 박재민(건국대), 박호정(고려대), 송성진(성균관대), 오중산(숙명여대), 이우영(연세대), 이젬마(경희대), 이종수(서울대), 정도진(중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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