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다시 메모리에 주목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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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와 고인류 간 두드러진 차이 가운데 하나는 '뇌의 크기'다. 현생 인류 뇌 용량은 이전에 비해 세 배나 증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뇌는 인체가 소비하는 에너지 총량의 20%를 소비할 정도로 핵심 기관이다. 인류 진화가 뇌 크기와 성능에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오늘날 컴퓨팅 발전 역시 중앙처리장치(CPU)와 메모리 발전에 좌우돼 왔다.

최근 첨단 기술을 대변하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자율주행차, 가상현실(VR) 등 새로운 개념과 용어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인류 생활을 풍요롭게 해 줄 첨단 기기와 응용 제품은 고성능 컴퓨팅이 뒷받침돼야 하며, 이러한 고성능 컴퓨팅의 혁신에는 중앙처리장치(CPU)뿐만 아니라 메모리 발전이 동반돼야 한다.

디지털 시대 도래와 함께 데이터가 폭증하면서 이들을 처리하는 컴퓨팅에 더 많은 기술이 집중되고 있다. 10년 전 0.3ZB(Zeta Byte, 10의 21제곱 바이트) 수준으로 집계된 데이터 트래픽은 모바일 시대를 거치면서 현재 약 32ZB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며, 10년 후에는 10배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 업계는 이렇게 늘어난 데이터를 어떠한 방식으로 소화하고 활용할지에 주목해 왔다. 데이터에 접근하고 저장하는 방식 변화는 앞으로 반도체, 그 가운데에서도 메모리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지표다. 새로운 기기가 등장하고 시장이 확장될수록 메모리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

한 예로 자율주행차 상용화가 가까워지면서 차량용 반도체 시장 선점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이크론은 자율주행차를 겨냥한 신규 공장에 30억달러를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또한 차량용 반도체 진입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하이퍼스케일 기업은 AI 시스템 운용 효율을 위해 기존 메모리 업체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ICT 업계 패러다임이 바뀌는 사이 반도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그 속에서 한국 반도체는 삼성과 SK하이닉스라는 두 기업만으로 세계 반도체 시장 20%를 차지했다. 1990년대 세계 시장 절반을 차지하던 수많은 일본 기업이 10%에 머물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성공 배경에는 바로 '메모리'가 있다.

20년 만에 세계 반도체 시장 1위 자리를 내준 인텔 역시 메모리 기회를 인식, 서버용 제품을 시작으로 메모리 시장 재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정부 정책 지원을 바탕으로 반도체 굴기를 외치는 중국 기업 또한 메모리 진입을 노리고 있다. 정작 우리는 메모리를 저평가하고 있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4차 산업혁명 대표 기술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라는 점에서 메모리는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심지어 몇 년 전부터 일부에서는 기존 CPU 중심 시대가 데이터센터 확장과 함께 메모리 중심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한다.

그동안 한국 반도체는 메모리에 편향된 사업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반대로 해석하면 메모리에서 이미 최고 수준이라는 강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도전과 응전을 이어 오며 성장했다. 앞으로 개척해야 할 길 또한 정답은 없다. 다만 우리가 깊이 뿌리 내린 분야,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메모리 중심으로 가치를 재발견하고 확장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더욱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은 메모리에 주목하고 있다.

박성욱 한국반도체산업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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