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24일 입법예고한 공정거래법 전면개편안은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특별위원회 논의 결과를 수정·반영한 것이다. 경제·사회 변화를 반영, 공정거래법 제정 38년 만에 '대대적 손질'을 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법 전반의 개선·현대화보다 대기업 규제 강화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지적이다. 재계에선 “1980년대 대기업 규제 틀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고 지적했다.
개정안 주요 주제로 '혁신성장 생태계 구축'을 제시하고도 실효성 있는 대안은 내놓지 못 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기업 규제 '대폭 강화'
공정거래법 개정안 가운데 재계 이목을 끈 것은 '기업집단법제' 관련 사안이다.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개편을 △경쟁법제 △절차법제 △기업집단법제로 구분해 추진했는데, 기업집단법제 사안이 대기업 경영과 직결됐다. 규제 강도를 높이거나 대상을 확대하는 게 골자다.
공정위는 총수일가 사익편취(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강화한다.
현행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계열사는 총수일가 지분이 상장사는 30%, 비상장사는 20%인 경우인데, 이를 모두 20%로 일원화 한다. 또한 이들 계열사가 50% 이상 보유한 자회사도 규제 대상에 포함한다.
지주회사 규제도 강화한다.
지주사가 의무 보유해야 하는 계열사 지분율 요건을 상향(상장사 20%→30%, 비상장사 40%→50%) 한다. 지주사를 이용한 총수일가의 지배력 확대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조치다. 다만 규제 대상은 새로 설립·전환되는 지주사로 한정했다.
대기업 소속 공익법인은 자사가 보유한 계열사 지분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했다. 다만 상장 계열사에 한해 특수관계인 합산 15%까지 의결권을 허용한다. 고객 투자금으로 계열사를 지배하지 않도록 만든 금융·보험사 관련 규정을 공익법인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법 시행 후 2년은 종전대로 의결권 행사를 허용한다”며 “이후 3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의결권 행사 비율을 축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보험사는 종전대로 특수관계인 합산 15%까지 의결권이 허용된다. 다만 적대적 인수합병(M&A) 방어와 무관한 계열사간 합병은 의결권 행사 허용 사유에서 제외했다. 과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사례를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도 제한한다. 대기업집단 계열사가 A→B→C→A 형태로 순환출자 고리를 형성할 때, A에 대한 C의 의결권 행사를 막는다. 신규 순환출자는 금지하지만 기존 순환출자는 규제하지 않아 생기는 '사각지대' 문제가 일정 부분 해결된다.
◇“대기업 옥죄기에 초점” 불만 고조…국회 통과 여부도 “글세”
재계는 공정거래법 개편안이 대기업 규제 강화에 무게가 쏠렸다고 반발했다. 공정위가 공정거래법 전반의 개선·현대화보다 '재벌개혁'에 초점을 맞췄다는 주장이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은 “성급한 조치”라는 지적이 나왔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는 1년 유예기간을 거쳐 2015년 시작됐다. 시행 3년 밖에 안 돼 실효성을 파악하기 힘든 시점에 규제 대상 기업을 확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공정위가 일감 몰아주기로 한진그룹을 제재한 사건은 정상거래 기준 제시가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고등법원이 공정위 패소 판결을 내렸다”며 “일감 몰아주기를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한 상황에서 규제를 재차 강화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말했다.
지주사 규제 강화는 지주사 체계 전환을 계획하는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란 지적이다. 그간 공정위가 '투명한 지배구조'를 이유로 지주사 체계 전환을 장려했는데, 이에 역행하는 조치라는 비판도 있다.
공익법인 의결권을 제한하면 대기업 공익 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다.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은 외국기업의 경영권 위협에 대응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순환출자 이해당사자간 신뢰 침해, 법 준수비용 증가 지적도 나온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공정거래법 전면개편이 대기업 규제 강화에 초점을 맞춘 것 같아 업계 우려가 크다”며 “우리 기업이 글로벌화 된 지금은 대기업 경제력 집중을 규제해야 한다는 과거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개정안은 기업 반발에 부딪힐 것으로 보여 국회 통과 여부가 미지수다. 개정안 핵심 가운데 하나인 '담합에 대한 전속고발권 폐지'도 기업에 부담이라는 우려다. 검찰이 직접 담합 조사에 나서는 것 자체가 기업에 큰 부담이기 때문이다.
공정위 내에서도 “민감한 사안이 많아 개정안 전체가 통과되긴 어려울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야·정이 핵심 사안을 중심으로 적극 협상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분석이다.
◇혁신성장 지원 '부실'…기업 활력 제고에 한계
공정위는 4차 산업혁명 시대 도래에 발맞춰 경쟁당국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개정안에 해당 사안을 담았지만 실효성이 떨어지고 특위 제안보다 후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위가 혁신성장의 상당 부분을 담당해야 한다”는 김상조 위원장 발언이 무색해졌다는 평가다.
알고리즘 담합 제재는 사실상 무산됐다.
알고리즘 담합은 기업 간 직접 의사교환·합의 없이 알고리즘을 이용해 상품 가격·공급량 등을 동일하게 결정하는 것이다. 특위는 유럽연합(EU)처럼 기업 간 경쟁을 회피하기 위해 협력·조정하는 '동조적 행위' 개념을 도입, 알고리즘 담합을 제재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공정위는 수용하지 않았다.
공정위는 “동조적 행위는 의미가 불명확해 입법 시 논란 가능성이 커 제외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대기업의 벤처기업 투자 지원을 위해 벤처지주회사 설립요건, 행위제한 규제를 완화한다. 그러나 이런 조치로 지금껏 실적이 전무했던 벤처지주회사 설립이 활성화 될 지 의문이다. 재계는 벤처지주회사 활성화가 아닌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 설립 승인을 요구한다. CVC는 대기업이 자회사 형태로 설립하는 벤처캐피털로, 국내에선 금산분리 규정으로 설립이 금지됐다.
기업결합 신고 기준에 종전 자산총액·매출액과 더불어 인수가액을 추가하는 방안에 대해선 기대와 우려가 겹친다. 2014년 페이스북이 와츠앱을 인수할 때 기업결합 신고 대상에서 빠져나간 것과 같은 사각지대 해소가 기대된다. 반면 대기업이 신생 유망 벤처를 인수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