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디젤게이트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독일 자동차 업체 폭스바겐은 미국에서 수십조원에 이르는 피해 보상안을 내놓았지만, 한국에서는 소비자에게 1인당 100만원 상당의 바우처를 지급하는 데 그쳤다.
폭스바겐은 현재까지 미국 내 차량 소유주와 환경 당국, 개별 주(州) 등이 제기한 소송 합의금으로 250억달러(약 27조원)를 지급했다. 앞으로 폭스바겐이 미국에서 추가 지불해야 할 배상 규모는 300억달러(약 3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업계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유무가 한국과 미국에서 폭스바겐의 이중적 태도를 가른 것으로 보고 있다. 강력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시행 중인 미국은 제조업자가 악의적 행위로 소비자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 소송 등을 통해 수십 배에 달하는 배상금을 물릴 수 있다.
◇손해배상 책임 '3배' 강화
한국도 제조업자가 제조물 결함을 알면서도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손해가 발생할 경우, 제조업자에 최대 3배까지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정부는 이달 19일부터 제품 결함에 대한 피해구제 강화를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제, 피해자 입증책임 완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제조물책임법(PL법)' 개정안을 시행한다. 제품 결함 여부, 결함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피해자 입증책임도 완화된다.
기존 제조물책임법은 제조물 결함으로 발생한 손해에 대한 제조업자 등의 손해배상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다만 배상책임이 높지 않아 제조업자가 악의적으로 불법행위를 계속되는 등 도덕적 해이에 대한 지적이 제기돼 왔다.
제조물 결함으로 손해배상을 받을 경우 소비자가 제조업자 과실을 입증해야 하는 책임도 완화된다. 지금까지는 제품 결함은 물론 결함이 손해와 직접적 연관관계가 있다는 점을 소비자가 입증해야 했으나, 앞으로는 제품을 정상적으로 사용했다면 연관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뀐다.
그동안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실제 발생한 손해만 배상하는 현행 민법 체계와 배치돼 하도급법이나 대리점법 등 특수한 거래관계에만 배상하도록 규정됐다. 그러나 이번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은 '제조되거나 가공된 모든 물건'을 대상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사실상 모든 상품거래에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산업계 영향은
산업계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앞두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대응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일부 업체들은 변호사를 영업하는 등 법무팀 인력을 강화하고, 태스크포스(TF)를 꾸리는 등 관련 조직 강화에 나섰다. 손해배상제 시행을 앞두고 소송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자동차 업계는 가장 큰 타격이 우려되는 산업군 중 하나다. 수만개의 부품으로 완성되는 자동차 특성상 제작 결함이 개정안이 명시한 생명 또는 신체에 중대한 손해를 입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토요타는 2013년 미국에서 발생한 토요타 캠리 급발진 사고 은폐 사태로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었다. 급발진 손해배상 소송에서 토요타는 피해자들과 338건의 소송 합의와 벌금, 리콜 비용 등 사태 해결에 총 40억달러(약 4조원)를 썼다.
다만 기업이 은폐와 같은 불법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징벌적 손해배상제 시행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을 전망이다. 리콜과 같은 합법적인 제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조물 결함에 대한 입증 책임이 소비자에서 기업으로 넘어오면서 관련 소송이 제기될 경우 기업 입장에선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일차적인 요인인 제조물 결함을 줄이기 위해 품질을 강화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면서 “손해배상제에 대한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관련 법안을 충실히 대응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취지를 살리려면 배상금 한도를 대폭 올려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한다. 개정안처럼 배상금 규모를 3배로 한정할 경우 실효성이 높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기업 불법행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면서 “배상금 한도를 최대 10배 수준까지 올린다면 기업이 애초부터 불법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차단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치연 자동차 전문기자 chiye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