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소희 기자] 2017년 설 파일럿 예능이 한 차례 휘몰아쳤다. 방송사에게 명절이란 단순히 특집 프로그램을 내놓는 때가 아니다. 새로운 예능 트렌드와 여론을 파악할 수 있는, 일명 ‘맥을 짚는 시기’다.
파일럿 프로그램은 정규편성에 한 발짝 앞서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적다. 시험대에 오른 파일럿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둘 경우 정규편성이라는 특혜를 얻게 된다.
지상파가 지난 27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2017년 설 파일럿으로 선보인 프로그램은 총 10개. 단순한 흥미에 치우친 프로그램은 실패를 맛봤으며, 트렌드를 따라잡은 결과물만이 좋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 신조어 활용의 좋은 예...‘오빠생각’
지상파 중 가장 트렌디하고 젊은 감각의 시도를 많이 하는 MBC는 이번 설 파일럿 경쟁에서도 단연 활약했다. 그 중 신조어를 활용한 ‘오빠생각’은 MBC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강조됐다.
‘오빠생각’은 스타의 의뢰를 받아 영업 영상을 제작하는 모습을 그린 프로그램이다. 스타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모습으로 팬이 되게 만드는 영상을 뜻하는 ‘입덕 영상’과 스타의 팬이 다른 이들 또한 팬이 되도록 만드는 행위를 일컫는 ‘영업’에서 착안했다.
신조어를 어설프게 활용할 경우 오히려 촌스러워질 가능성이 크다.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일차원적인 활용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빠생각’은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영업’이라는 소재를 ‘회사’로 확장해 명확한 콘셉트를 잡았다.
상사인 탁재훈을 필두로 유세윤, 양세형, 솔비, 나인뮤지스 경리, 레드벨벳 조이 등이 선보이는 콩트는 또 하나의 재미를 불어넣었다. 웹툰작가 이말년을 섭외해 ‘영상 제작사’의 느낌을 살리는 디테일까지 뒀다.
MBC 새 드라마 ‘역적’에 출연하는 윤균상과 채수빈이 게스트로 참석해 홍보성이 짙게 묻어나 아쉽긴 하지만, 아이돌이 아닌 배우를 상대로 했다는 점에서 뻔한 루트를 탈피했다. 연예인의 새로운 진가를 다양하게 발굴하는데 좀 더 신경을 기울인다면 어느 게스트가 와도 적용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 대세는 관찰예능...‘발칙한 동거-빈방 있음’ ‘엄마의 소개팅’
‘발칙한 동거-빈방 있음’(이하 ‘발칙한 동거’)은 사람이 사람에게 적응해가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게 될, 옴니버스 드라마 같은 리얼리티 예능이다. 라이프스타일이 전혀 다른 연예인들을 붙여놓음으로써 신선한 케미를 꾀했다.
대표적인 이색커플은 김구라와 한은정으로,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전략은 통했다. 김구라와 극과 극 성격인 한은정은 돌발 요소를 곳곳에 던졌고, 덕분에 시청자들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김구라의 츤데레 매력을 관찰하며 빠져들었다.
걸그룹과 셰프의 조합도 이색적이었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를 구분 못하던 오세득은 우주소녀를 알게 됐고, 우주소녀는 아빠 같은 오세득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블락비 피오와 김신영, 홍진영은 서로 다른 성격에도 불구하고 삼남매 같은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 결혼했어요’와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발칙한 동거’는 남녀사이의 진전이 아닌 ‘사람’간의 관계에 초점을 뒀다는데 차이점이 있다. 만약 김구라-한은정처럼 남녀 각각 한 명씩 짝을 이뤘다면 기획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았을 터이지만, 다양한 나이대와 성격의 인물이 조화를 이뤄 위험을 피했다.
KBS2 ‘엄마의 소개팅’은 혼자가 된 스타의 엄마에게 남자친구를 소개시켜 주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자극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소재지만, 요즘 잘 나가고 있는 SBS ‘미운우리새끼’의 키워드 ‘엄마’와 ‘관찰예능’을 잘 버무려놓았다.
‘이혼’ ‘재혼’ 등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고 있는 예능계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민감하고 어려운 소재임은 확실하다. ‘엄마의 소개팅’은 엄마를 ‘여성’ 그 자체로 존중하고 인식하며 이런 우려를 잠재웠다. 여기에서 나오는 흐뭇함과 뭉클함은 착한 관찰예능을 만들어냈다.
◇ 소통의 시대, ‘공감’이 통한다...‘신드롬맨’ ‘천국사무소’
어떻게 보면 ‘공감’이라는 키워드는 관찰예능과 이어지는 맥락이기도 하다. 관찰은 ‘리얼’ 그 자체이고, 연예인이 아닌 한 사람으로의 솔직한 모습은 시청자와 장벽을 허물고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내세운 파일럿이 바로 KBS2 ‘신드롬맨’과 SBS ‘천국사무소’다. 두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공감을 얻으며 정규편성을 기대케 했다.
‘신드롬맨’의 부제는 ‘나만 그런가?’다. 혼자만 그렇다고 느꼈던 의문이 공감을 얻으면 하나의 신드롬이 되는데, 신드롬은 시대를 대변하는 모습이자 세상을 바꿀 징후라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전문가의 첨언으로 예능과 교양의 중심을 잡았다는 것이다. ‘신드롬맨’에는 심리학 전문가인 닥터 짱가가 출연해 신드롬의 배경과 심리, 영향 등을 분석했다. 솔비에게는 애국 신드롬이 아닌 ‘장 의존적 성격’이라고 짚으며, 착각하고 있던 자신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신드롬맨’은 스스로를 되돌아볼 시간도 없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 불안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에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공감을 심어주는데 의미를 갖는다. 더 나아가 시청자들이 방송을 보고 자아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끔 전문적인 심리 지식을 제공, 진정한 공감과 소통을 이끌어냈다.
‘천국사무소’도 마찬가지다. 먼 훗날의 자신이 되어보는 지난해 파일럿 ‘미래일기’와 비슷한 포맷이기도 한데, ‘천국사무소’는 아예 ‘사후(死後)’를 다뤘다. 인생에 있어 소중했던 기억들은 많지만 천국에는 한 가지 기억만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것.
기억을 하나하나 지워가는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 브라운관 속 ‘천국사무소’에 도착한 연예인은 더이상 스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구와 가족을 곁에 둔, 시청자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비춰졌기에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천국사무소’는 휴머니즘과 함께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착한 예능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소희 기자 lshsh324@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