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에 최근 낭보가 전해졌다. 글로벌 경쟁법 전문 저널 `글로벌 컴피티션 리뷰`(GCR)의 경쟁당국 평가에서 공정위가 미국, 독일, 프랑스 등 경쟁 당국과 함께 최고 등급을 받았다는 소식이다. 공정위는 지난해(Very Good, 별 4.5개)보다 한 단계 높은 Elite(별 5개) 등급을 받았다. 공정위 관계자는 “올해 공정위 최고 성과 톱3에 들어갈 정도의 쾌거”라고 말했다.
GCR 평가처럼 우리나라는 공정거래법 운용 35년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 당국이 됐다. 과거 우리가 공정거래법을 배우던 미국·유럽과 동등한 입장에서 공조하고, 세계 각국에 우리 노하우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평가와 달리 국내에서는 연일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무혐의 사건 증가와 법원 패소, 잊을 만하면 터지는 비리 때문이다. 경제검찰 위상을 되찾자는 목소리는 높지만 `전속 고발권 폐지` 같은 권한 축소 주장에 대응하기도 바쁜 게 현실이다.
◇무혐의, 또 무혐의…부처 평가에선 `최저 등급`
최근 공정위는 6개 시중은행의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 의혹에 대해 사실상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공정위는 지난 2012년 7월 조사에 착수, 무려 4년 동안 조사한 끝에 국민·농협·신한·우리·하나·SC 등 6개 시중은행이 CD 금리에 담합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심의에서 증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해 `심의절차 종료`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공정위 관계자는 “조사 초기부터 무리라는 평가도 있었다”면서 “공정위 사건 처리에 또 하나의 오점을 남긴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위의 무혐의 결정은 최근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지난 4월 공정위는 1년간 조사 끝에 오라클의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 `끼워 팔기`와 `유지보수 부분 판매 금지` 혐의에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공정위가 정보통신기술(ICT) 전담팀을 구성해 착수한 첫 사건이다.
이에 앞서 공정위는 KT의 계열사 부당 지원, 골프존의 가격 담합, 이디야의 가맹사업법 위반 혐의에도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5년 넘게 이어진 롯데·신라 등 면세점의 환율 담합은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부당이득이 미미하고, 경쟁 제한 효과도 크지 않다”며 과징금 부과 없이 시정명령만 내렸다.
무혐의 처분, 솜방망이 처벌이 이어지자 공정위의 역량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공정위의 칼날이 무뎌진 것이 지난해 `패소율 증가`로 홍역을 앓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피심인 항소로 고등법원에서 공정위가 패소하는 비율이 높아지자 `무리하지 않는 수준`으로 처벌하고 있다는 평가다. 공정위 관계자도 “그런 분위기가 실제 느껴지는 게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공정위의 힘을 빠지게 하는 일은 사건 처리만이 아니었다. 올해 초 발표된 `2015년도 정부업무평가`에서 공정위는 가장 낮은 등급인 `미흡` 평가를 받았다. 국정과제·정책홍보에서 `보통`을 받았지만 규제 개혁 성과가 `미흡`한 것으로 평가됐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직원 비리도 공정위의 위상을 흔들었다. 국회는 전속 고발권 폐지를 주장하며 공정위의 권한 축소에 나섰다.
◇원천 봉쇄된 조직·권한 강화…역량 저하로 이어져
여러 지적에 공정위도 `할 말은 있다`는 입장이다. 특히 무혐의 처분이 가능한 것은 조사를 담당하는 사무처와 심의를 맡는 공정위원이 명확하게 분리됐다는 증거인 만큼 무조건 저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무혐의 처분 빈발은 큰 사회 문제이며, 결국 공정위의 역량 부족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직원도 스스로 인정한다.
공정위의 역량 저하에는 구조 및 환경이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인력 부족은 공정위의 고질병이다. 인력 부족은 업무 과부하 차원을 넘어 조사 역량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공정위 정원은 2007년에 이미 500명을 넘어섰지만 9년이 지난 5월 31일 현재 535명까지 느는데 그쳤다. 공정위 관계자는 “정원은 매년 1~2명 느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공정위 인력은 제자리걸음이지만 업무는 절대량이 크게 늘고 사안도 복잡·다양해졌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연평균 2000건이던 사건 처리는 2001년 이후 4000건 이상으로 급증했다. 지난해 공정위가 처리한 사건은 총 4367건으로 2014년보다 7.0% 증가했다.
소관 법령이 늘어도 인력에는 변화가 없다. 새로 생긴 규제를 담당하는 조직을 신설하려던 노력은 번번이 실패했다.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생겼지만 전담 조직 설치는 좌절됐다. 전문성이 필요한 글로벌 ICT 기업 감시를 위해 지식재산권심사과 신설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오는 12월 새롭게 시행되는 대리점법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사무소에 관련 과 신설을 추진했지만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공정위 관계자는 “소관 법이 추가되면 업무가 크게 늘어나는데 인력은 제자리”라면서 “다른 부처는 소관 법을 하나라도 더 맡으려 하는데 공정위는 운용하는 법이 느는 게 반갑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공정위의 조직·권한 강화가 유난히 어려운 이유는 사회 및 정치 관계에서 원인이 있다. 공정위의 조직 확대는 기업 활동 저해로 이어진다는 편견 때문에 기업은 물론 다른 부처와 국회도 섣불리 `공정위 편`에 서지 않으려 한다. `경기 부양`이 최대 화두인 환경도 이런 분위기를 심화시켰다. 공정위의 조직·권한 강화는 사실상 `원천 봉쇄`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규제 완화가 최대 국정 과제인데 `규제 기관`인 공정위가 정부 업무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는 당연히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국회는 공정위의 과오를 수시로 지적하면서도 조직 확대와 역량 강화에는 무관심하다. 공정위의 역할 확대에 관심이 있는 국회의원은 안철수 국민의당 전 상임공동대표 등 소수에 불과하다. 국회는 사실상 무력화된 전속 고발권을 완전히 폐지하는 법안을 발의하는 등 오히려 공정위의 권한 축소에 노력하는 모습이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