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화 전 중소기업청장은 올 1월 이른바 `공익근무`를 끝내고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로 돌아왔다. 재임기간은 2년 10개월이었다. 교수 출신이지만 최장수 청장 기록을 세웠다. 중소기업과 벤처 전문 학자답게 청장 재임 시 벤처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획기적인 정책을 도입, 창조경제 구현에 앞장섰다. 민간주도형 기술창업지원 프로그램 팁스(Tips)도 그가 도입했다.
청장 재임 시 간부회의 시간을 활용해 독서토론회를 열고 소통을 실천했다. 외부 인사에 대한 평가가 야박한 관료 사회에서 “탁월한 논리를 바탕으로 소신껏 발로 뛰며 일한 청장”이란 평가를 받았다.
한 전 청장을 5월 31일 오후 4시 서울 성동구 한양대 경영관 604호실에서 만났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마치 소도서관에 온 듯 했다. 사방이 각종 책으로 꽉 찼다. `독서가`라는 별명에 걸맞게 연구실 도서는 3000여권이다. 자택에도 이만큼 책이 있다고 했다.
-교수로 돌아온 소감은.
▲원래 자리로 온 것이니 소감이라고 할 게 없다. 지난 3월부터 2개 과목을 강의한다. 처음에는 모든 걸 직접 하려니 불편했다. 2개월 정도 지나니 괜찮다. 집에서 지하철로 학교를 오간다.
-공직은 어떻게 맡게 됐나.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에 자문그룹에서 중소기업과 벤처에 대해 자문역을 했다. 허태열 당시 비서실장이 전화로 청장직을 제의했다. 그 무렵 나는 한양대 기획처장을 끝내고 경영대학장으로 일한 지 7개월 정도 됐다. 학교에서는 할 일이 많았다. 총장과 이사장의 양해를 얻어 공직을 맡았다.
한 전 청장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 창업보육센터소장, 기획처장, 경영대학장을 역임했다. 코스닥상장심사위원장과 한국중소기업학회장으로도 활동했다. 벤처육성 유공자로 대통령표창과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초일류기업으로 가는 길`을 비롯해 `벤처창업과 경영전략` `불황을 뚫는 7가지 생존전략` 등 다수가 있다.
-최장수 청장의 비결이 궁금하다.
▲중소기업과 벤처 전문가로서 그동안 생각한 어젠다를 적극 추진하다 보니 장수 청장이란 기록을 남기게 됐다.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가 말하는 리더의 자격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진정성, 즉 진심이다. 다음은 책임지는 자세다. 조직의 장(長)은 책임을 아래로 미루면 안 된다.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공직자들과 일해 보니 자부심이 강했다. 나는 일방이 아닌 양방 토론을 하고자 노력했다.
-독서토론회는 어떻게 마련했나.
▲취임하고 나니 분위기가 딱딱했다. 조직의 내부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취임 2개월 후 월요일 간부회의 시간을 활용해 독서토론회를 시작했다. 첫 번째 토론 주제는 창조경제 앞서가기로 정했다. 내가 읽을 책을 정하고 발제를 했다. 이후 내부 추천을 받아 토론할 책을 선정했다. 간부회의에는 40여명이 참석하는데 돌아가면서 발제하고 30분 이상 토론한다. 국회가 열릴 때는 하지 못했다. 양극화와 스타트업, 중국 시장, 미래기술 트렌드, 비즈니스 모델 등 다양한 책을 읽고 간부들과 허심탄회하게 토론했다. 재임 기간에 모두 68차례 독서토론회를 열었다. 주요 어젠다는 도시락을 먹으면서 몇 시간 토론, 결론을 도출했다. 정책 토론도 많이 했다.
-재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침체된 벤처 생태계의 활성화를 위한 각종 정책을 추진한 일이다. 중소기업 기술보호법 제정, 공공조달 최저가 입찰제 폐지, 중재제도 도입, 기술보증제도와 인수합병(M&A) 활성화, 공영홈쇼핑 채널 개국, 팁스 도입 등이다. 팁스 도입과 최저가 입찰제 폐지는 소신을 갖고 추진했다. 정부 구매 시 최저가 입찰제를 적용하면 제품이나 서비스 질이 떨어진다.
-아쉬운 점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중소기업의 글로벌화를 충분히 지원하지 못했다. 예산과 인력 부족 때문인데 해결이 쉽지 않았다. 재도전 활성화도 미완으로 남겼다. 중소기업 특허를 보호해 주지 않으면 해외 진출은 불가능하다. 무기 없이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다. 우리가 국내 시장에서 경쟁해 봐야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야 일자리도 만들고 경제 규모도 키울 수 있다. 중소기업 글로벌화를 위해선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전문가는 단기간에 양성할 수 없다. 이제 국가 전략의 우선순위를 글로벌화에 둬야 한다. 불필요한 곳에 보도블록을 깔거나 도로를 내는 대신 지식재산권을 보호하고 글로벌화에 주력해야 한다. 가업 승계 중소기업을 `명문 장수기업`으로 지정하는 법안을 냈는데 기간이 처음 30년에서 국회 처리 과정에서 45년으로 늘었다. 100년 가는 중소기업이 많이 나와야 한다.
-창업을 활성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창업에 실패해도 재도전 기회를 줘야 한다. 우리는 창업자금 조달이 투자보다 융자가 더 많다. 채무 상환 조정에 관해 성실경영확인제도를 통과시켰다. 정책 자금 70%, 일반자금 50%를 감해 주는 제도다. 사업 실패 시 부정이나 부패자를 제외하고 성실실패자로 인정, 신용회복 기간을 단축해 주자는 것이다. 재도전 문제는 정부 관련 부처가 공동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재도전에 관해서는 사회 선언이 필요하다.
-재임 중에 팁스를 도입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벤처는 냉각기였다. 2000년대 초 벤처 붐이 불 때 대기업의 우수 인력들이 벤처에 뛰어들었다. 근래 우수 인력은 창업을 절대 안 한다. 정부가 아무리 창업을 권장해도 대기업이나 공직으로 빠진다. 창업에 실패하면 인생낙오자로 인정받는 게 현실이다. 민간 주도의 우수 인력 유입 방안이 팁스 제도다. 벤처업계의 반응이 가장 좋았다. 성공한 벤처인이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해 1억원을 투자하고 보육, 멘토링을 하면 정부가 3년 동안 최대 9억원까지 지원하는 1+9제도다. 창업 실패율은 줄이고 성공률은 두 배 이상 높았다.
일부에서 지원을 너무 많이 해 주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기존의 분산 업무를 패키지로 묶자 우수 인력이 대거 몰려들었다. 우리가 제조업 창업을 확대해야 중국과 경쟁해서 먹고산다. 중국은 이제 하청 국가가 아니다. 대기업은 더 이상 일자리를 늘릴 수 없는 구조다. 일자리는 혁신 창업이 만든다. 우리 현실은 일자리는 늘지 않고 자영업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게 문제다.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에는 생계형 창업을 한다.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어가면 기회추구형 창업이다. 국가 전략으로 창업은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한다. 미국, 중국, 일본은 최고지도자가 이 문제를 직접 챙긴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히든챔피언`인 `월드클래스기업`의 목표를 300개에서 3000개로 늘려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3만개가 창업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수 인력이 기술 창업에 많이 도전하도록 팁스를 최대한 확대해야 한다.
-외국은 우수 인력이 창업을 하나.
▲미국, 중국, 영국, 독일 같은 나라는 최고 인재들이 창업을 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가면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한 최고 인재들이 창업을 이끌고 있다. 이들보다 더 우수한 한국 인재가 창업해야 승산이 있다. 이제는 국가 간 창업생태 경쟁이다.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 대박을 내야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중소기업이 하도급 불공정 거래를 당해도 대기업의 보복이 두려워서 문제 제기를 못한다. 청장 재직 시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강력히 주장, 도입했다. 중소기업이 피해 입증을 해야 한다. 그동안은 `현저한 피해 입증`이었으나 이걸 `상당한 피해 입증`으로 바꿨다. 이것도 쉽지 않았다. 한 번은 기술피해 현장 간담회에서 억울함을 당한 중소기업인이 엉엉 울었다. 나중에 기술보호지원법 간담회에 오라고 했더니 “아직은 회사를 접거나 이민 갈 준비가 안 돼 있다”며 불참했다. 이게 현실이다.
-최근 팁스가 논란이 됐다. 어떻게 보나.
▲진실은 재판에서 가려질 일이다. 팁스에 대한 해석상 문제가 아닌가 싶다. 검찰이 팁스 운영사가 지분을 많이 받았다며 편취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제도는 처음부터 운영사에 인센티브를 주도록 설계했다. 우수 기술의 창업이 늘어야 일자리가 생기고 국가 경제가 발전한다. 검찰의 더벤처스 대표 구속 수사로 벤처 투자가 크게 위축됐고, 투자업계는 검찰의 눈치를 보며 불안에 떤다고 한다. 투자 리스크가 큰 데다 여기에 검찰 리스크까지 겹친 셈이다. 더벤처스 대표는 근년에 가장 성공한 벤처인이다. 벤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자칫 살아나던 벤처 투자의 불씨가 꺼질 수도 있다. 벤처 투자 활성화 없이 창조경제는 어떻게 구현하는가.
- 창업 시 유념해야 할 점은.
▲인생은 길고 창업은 짧다. 충분히 학습하고 개인 리스크를 합리적으로 조정해 창업해야 한다. 한 번에 대박 낼 생각을 하지 말고 생존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뜻을 함께하는 팀을 꾸려서 창업하는 게 좋다. 혼자 창업하면 힘든 일이 많다. 간혹 태도가 불량한 창업자가 있다. 불량한 태도는 창업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피터 드러커의 책이다. `기업가 정신` `변화 리더의 조건` `위대한 혁신` 등이다. 젊은이들이 읽어 보기를 권한다.
-좌우명과 취미는.
▲성경 구절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다`다. 창업자는 두려움도, 자만심도 가지면 안 된다. 균형감을 가져야 한다. 취미는 독서와 트래킹이다. 일주일에 책 두 권은 읽는다.
이현덕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