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뜨니 부엌 한가운데 의자에 앉은 채 손이 묶여 있다. 손에 쥔 조이스틱을 움직이니 묶인 손을 조금 움직일 수 있었다.
앞에는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의자에 묶인 나는 그를 부른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남자가 내게 다가온다. 그는 칼을 쥐고 내 손에 묶인 줄을 끊으려 애를 쓴다. 그의 등 뒤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린다.
한 여자가 갑자기 부엌으로 들어온다. 얼핏 봐도 눈동자가 정상이 아니다. 내 손을 풀어주려는 남자는 아직 그녀의 존재를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알려주려 했지만 내 목소리는 이 공간에 들리지 않는다. 식칼을 손에 쥔 여자는 남자의 등을 푹 찌른다. 사방으로 피가 튄다.
그녀는 남자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의 잘린 목이 내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온다. 사방을 둘러봤지만 이제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그녀가 어디서 나타날지 예측이 안 된다.
“게임 도중 무서워 도저히 못하겠으면 기기를 만지지 말고 오른손을 잠시 들어주세요.”
12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지스타 2015’ 소니컴퓨터엔터인먼트코리아(SCEK) 부스. 회사가 내년 상반기 출시할 가상현실(VR) 기기 ‘플레이스테이션VR’를 체험하려 사람들이 줄을 섰다. 수능일인데다 행사 첫날이어서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유독 몇몇 전시관은 눈에 띄게 붐볐다.
대학생 강영철(24)씨는 “VR게임을 체험하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렀다”며 “밖에서 VR게임을 하는 것만 쳐다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기자가 체험한 공포게임 ‘키친’을 VR로 플레이하는 자리에서는 비명소리와 웃음소리가 함께 들렸다.
지스타에는 SCEK를 비롯해 엔비디아, 넥슨 등이 VR게임을 전시했다. 지스타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올해 지스타는 유독 VR 콘텐츠가 많이 출품됐다”며 “아직 출시되지 않은 VR 콘텐츠를 미리 경험해보려는 관람객이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해에 비해 출품된 온라인게임 수가 줄었지만 VR를 내세운 콘솔게임이 자리를 대신해 열기가 뜨겁다.

엔비디아는 부스가 붐빌 것을 우려해 현장에서 예약제로 체험관을 운영했다. 부스 관계자는 “행사 첫 날인데도 오후까지 체험 일정이 꽉 찼다”며 “최대한 많은 인원이 콘텐츠를 경험하는 것도 좋지만 대부분 첫 경험인 만큼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VR는 ‘Virtual Reality’ 약자다. 헤드기어를 쓰고 가상공간에서 체험하는 일체 행위를 말한다. 게임은 VR 가능성을 무한대로 펼칠 수 있는 장르다.
SCEK는 지스타에서 ‘키친(공포)’ ‘썸머레슨(연애 시물레이션)’ ‘런던 하이스트(액션)’ 등 다양한 장르 VR 게임을 선보였다.
아직 데모 수준이지만 내년 상반기 국내시장에도 정식 출시하는 플레이스테이션VR를 위한 사전 마케팅 성격으로 게임 일부를 대중에게 공개했다.

플레이스테이션VR는 플레이스테이션4와 연결해 사용한다. 벌써 국내외에서 수십종 콘테츠가 플레이스테이션VR용으로 개발 중이다. 우리나라 개발사로는 로이게임즈와 스코넥엔터테인먼트가 플레이스테이션VR 게임 만들기에 도전한다.
카와우치 시로 SCEK 사장은 “이번 행사에서 꼭 플레이스테이션VR을 체험하길 권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VR게임 장르는 아직 본격적으로 개화하지 않았다. 헤드기어를 쓰고 즐겨야하는 한계 탓에 초점을 잘못 맞추면 화면이 흐려 보이거나 콘텐츠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전달받기 어렵다.
‘썸머레슨’ 같은 시물레이션 게임은 캐릭터와 플레이어 사이 상호소통이 중요하다. 게이머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방식 의사표현만 가능하다. 소통한다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게임에 끌려가는 느낌이 강하다.
그럼에도 게임업계는 VR에 기대를 건다. 콘솔게임사뿐 아니라 온라인, 모바일게임사도 VR에 본격적으로 손을 댔다.
넥슨은 지스타에서 자사 게임 메이플스토리를 VR로 재해석해 전시했다. 오큘러스리프트와 삼성기어VR로 2D 온라인게임 메이플스토리를 360도로 볼 수 있도록 구현했다.

고개를 상하좌우로 움직이면 마치 게임 공간 속에 들어온 듯 색다른 경험이 가능하다. 오큘러스에 차세대 입력장치 ‘립모션’을 결합했다. 손동작을 이용해 버섯 몬스터를 해치우는 플레이를 만들었다.
박재훈 NXCL 팀장은 “메이플스토리VR는 게이머에게 VR 경험을 주는 차원에서 특별히 개발한 것”이라며 “아직 상용화가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게임 콘텐츠를 확장하는 일종의 테스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립 게임개발사도 VR에 관심을 기울인다. 가상화 영역은 아직 절대 강자가 없는 시장이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경쟁이 가능하다.
방 탈출 퍼즐게임 ‘룸즈:불가능한 퍼즐(Rooms:The Unsolvable Puzzle, 룸즈2)’로 2015 게임대상에서 우수상과 인디게임상을 받은 김종화 핸드메이드 대표는 게임을 VR로 다시 만든다.
기본적인 게임 플레이는 같지만 게이머 움직임에 따라 게임 진행에 힌트를 주는 등 다양한 방법을 고민 중이다. 방 탈출 게임은 다양한 물건과 힌트를 이용하기 때문에 VR 플레이가 어울린다.
김 대표는 “일단 VR 개발에 도전해본다는 의미가 크다”며 “게임을 진행하는 입력 방식이 다양해질수록 콘텐츠 역시 무궁무진하게 진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대원 한국VR산업협회장(서강대 교수)은 “VR는 디지털 콘텐츠 경험을 엄청나게 확장할 수 있는 장르”라며 “내년을 기점으로 세계에서 VR 상용 콘텐츠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부산=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