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거품처럼 꺼졌던 벤처 창업 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 최근에는 안정된 취업 대신에 도전적 벤처 창업을 선택하는 청년도 늘고 있다. 정부의 전폭 지원 속에 벤처기업 수도 3만개를 넘어섰고 벤처투자 규모도 상반기에만 1조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벤처기업의 질적인 성장과 선순환 벤처 생태계 구성은 아직 미흡하다는 분석이다.
‘정보통신의 미래를 생각하는 모임(정보통신 미래모임)’은 지난 21일 서울 삼정호텔에서 ‘2015 대한민국 벤처, 미래를 꿈꾸고 현실을 말하다’는 주제로 벤처사업가 3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해법을 찾아보았다.
◇참석자
-주영흠 잉카인터넷 대표
-김영준 스윗트래커 대표(청년창업가협회 회장)
-박나라 모코플렉스 대표
◇벤처기업 3만개 시대, 상반기 벤처 투자만 1조원
벤처기업은 정부의 적극적 육성정책에 힘입어 2000년대 초 중흥기를 거쳐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올해 초 벤처기업 수는 사상 최초로 3만개를 넘어섰다.
지난 1998년 2000여개 수준이던 벤처기업은 2006년 1만2000개를 넘어섰고 2010년에는 갑절인 2만4000여개에 이르렀다. 벤처기업 매출액도 2013년 기준 198조7000억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13.9%를 담당했다.
벤처 창업으로 출발해 중견기업으로 자리 잡은 기업은 2013년 기준 642개로 중견기업의 16.6%를 차지했다.
벤처 투자도 벤처 거품을 지나 회복세를 거쳐 올해 상반기 약 1조원(9569억원) 규모에 이르러 작년 동기 6912억원 대비 38.4% 증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벤처투자업체는 517개로 전년 동기 418개 대비 23.7% 늘어났다.
중기청은 올해 벤처 투자가 증가세를 유지한다면 2000년도 벤처 붐 당시 투자 규모인 2조211억원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벤처, 현실을 말하고 미래를 꿈꾸다
벤처기업에 관심이 높아지고 투자도 증가세로 돌아섰다. ‘카카오’ ‘쿠팡’ ‘배달의민족’ 등 벤처기업 성공신화가 주목받으면서 국내기업에 해외 투자 유치 규모도 커졌다.
하지만 ‘장밋빛 현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규모 면에서는 크게 성장했지만 질적 성장은 여전히 개선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것이 벤처기업가의 공통된 생각이다.
주영흠 잉카인터넷 대표는 “20년 전에 보안사업을 시작했고 당시 10개 정도 되는 업체가 코스닥에 상장했다”며 “내수 기반으로 사업을 하다 보니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정책적 지원도 없고 회사 차원 관리나 준비가 부족해 상장 폐지되는 기업도 다수 나왔다”고 말했다.
주 대표는 2000년에 인터넷PC보안 서비스사업으로 잉카인터넷을 창업, 국내를 대표하는 정보보호업체로 자리 잡았다. 그는 20여년 전 벤처 붐을 떠올리며 당시 개발이나 영업 등 특정 영역에서 뛰어난 리더가 앞장서 벤처 창업과 상장에 성공했지만 자금을 운용하는 준비 등 경영 능력 부족으로 지속 성장을 하지 못하고 해외기업과의 경쟁에서도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주 대표는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으로부터 수요가 폭증하면서 정보보호 분야 산업 미래 전망은 장밋빛이었지만 한정된 내수시장 기반 사업으로 벤처기업이나 중견기업이나 (20년 전과)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 문제가 정보보호산업 출혈경쟁이다. 포털사이트 개인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무료백신 배포나 공공기관의 저가 예산 편성과 사업 발주 등이 사례로 제시됐다. 최저가 입찰제로 인해 일부에서는 ‘0원 입찰’ ‘마이너스 입찰’까지 나온다고 현실을 전했다.
스마트택배 사업을 전개하는 김영준 스윗트래커 대표도 벤처기업은 자금, 경험, 회사규모, 네트워크 등이 기존 기업과 경쟁이 안 된다며 대다수 청년 창업가가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고 발표했다.
김 대표는 청년창업가협의회 초대 회장을 맡고 있다. 청년창업가협의회는 현재 회원기업이 1000여개로 창업 3년차 이하 기업이 대다수다. 그는 정부가 앞장서 벤처 창업을 지원하지만 지속 성장까지 제대로 사후 관리하는 곳은 없다며 청년 창업기업 현실을 털어놨다.
김 대표는 “우리나라는 창업하면 재기하기 힘들고 한 번 신용불량자가 되면 회복하기 어렵다”며 “최초 창업할 때는 돈이 많이 들지 않고 이후 아이디어를 사업화해 제품을 시장에 출시할 때 가장 돈이 많이 든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시작하는 청년 창업가는 드물다”고 전했다. 이후에는 민간 창업투자회사(벤처캐피털)나 은행 융자를 받아 사업을 해야 하는데 은행은 최근 3년 동안 매출 자료를 가져가야 한다. 하지만 창업 초기부터 의미 있는 매출을 거두는 벤처기업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김 대표는 “초기 창업자의 한계는 경험 부족으로 인해 통장 잔고가 떨어졌을 때를 자금 조달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통장에 돈이 있을 때 은행을 가야 돈을 빌려준다는 것을 청년창업가는 모른다”고 꼬집었다. 그는 공격적 제언이란 전제로, 장애인기업이나 여성기업에 공공구매 일정 비율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청년창업기업에도 안정적 시장 진입을 위한 성장 디딤돌이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벤처 창업, 정부 지원의 명과 암
이번 정부 들어 부처별로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쉬운 창업’으로 인한 벤처기업의 자생력 확보가 문제되기도 했다.
김 대표는 “나 역시 정부 창업지원 사업 혜택을 입은 사람으로서 정부 자금으로 창업하면 안 된다는 말은 할 수 없다”며 “정부 지원책과 더불어 자기 돈으로 창업을 해야 하며 특히 대학생 창업은 장려하지 않는다”고 의견을 밝혔다. 그는 창업을 하기 전에 해당 업계에서 경험을 충분히 쌓고 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스윗트래커 역시 비전문 영역에 진출할 때는 제휴 등 방법을 이용한다고 덧붙였다.
박나라 모코플렉스 대표도 “2012년과 2013년 선도벤처 관련 정부 지원사업을 잘 활용한 바 있다”며 “한편으로는 자금 지원을 받고 활용하는 데 제약사항이 너무 많았다”고 정부 지원사업에 참여했던 경험을 밝혔다. 그는 정부 지원을 받으면 작성해야 할 문서작업이나 고용창출 등 기준 요건을 충족하기가 어려웠다며 단순하게 지표를 보기 위한 것보다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으로 변경되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주 대표 역시 정보보호 분야에서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전문인력 수급과 해외 진출 지원 방안을 들었다. 최근 사이버침해 사고나 산업기밀 유출로 인한 피해가 증가하면서 다양한 보안 위협 사례가 나오고 있다. 이에 정보보호 인재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전문인력 공급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교육기관에서 인재를 배출하면 정보보호 전문업체에서 경력을 쌓게 되는데 해당 인재의 공공기관 유출문제가 심각하다고 토로했다.
주 대표는 “업계 입장에서는 교육기관에서 기본적인 것만 배우고 졸업한 인력을 회사가 시간과 자본을 투자해 재교육해서 고급화시키는 것인데, 이를 정부가 과실만 따먹는 셈”이라며 “장기적으로 특례제도나 인센티브 제도 같은 것을 운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부기관이 민간기업의 인력을 데려감으로써 생기는 피해를 최소화해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벤처기업 해외시장 개척에서도 무조건 기업 수를 많이 내보내겠다는 목표보다는 기업이 원하는 부문에 투자를 해 정밀한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타기업을 하나라도 제대로 키워야 선단을 구성해 해외시장에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진형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장은 “정부에 특정 기업을 집중 지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한 요구”라며 “정부 역할은 인력 양성과 시장정보 제공 정도며, 나아가 기술 연구개발(R&D)에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견을 내놨다.
김명희기자 noprin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