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장기 ‘체스’는 여섯 가지 말과 아주 간단한 규칙에 따라 운용되는 단순한 경기다. 하지만 컴퓨터가 세계 체스 챔피언을 이기는 데는 수십년이 걸렸다. 인간과 대결한 슈퍼컴퓨터는 수십만 회의 방대한 과거 체스 게임 데이터를 병렬 처리해 승률이 가장 높은 다음 수를 찾는 방식으로 프로그램 됐는데,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다소 민망한 수준이었다. 체스 경기 규칙이 워낙 간단하고 단순한 계산 속도에서는 사람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최근 자동차 기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단어는 ‘자율주행’이다. 정부에서도 이 분야에 대대적으로 지원할 기세다. 나는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자율주행 기술이 태동할 당시 4년간 연구원으로 참여했고, 이미 1990년대 중반에는 시속 100㎞에서 차량 10여대의 자율 군집주행을 수차례 시연한 바 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훨씬 개선된 센싱 및 연산 기능을 바탕으로 일반적인 상황에서 자율주행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돌발 상황 대처 능력이다.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건, 즉 시나리오상에 없는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것은 빠른 계산 속도와는 크게 상관이 없으며 상당히 높은 인지 능력이 필요하다. 현재 기술적으로 가장 앞선 것으로 알려진 구글 자율주행차는 초정밀 3차원 지도를 이용해 잘 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도에 미처 나와 있지 않은 상황, 예를 들면 노면 포트홀은 피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는 수준이다. 복합적인 상황 인식은 컴퓨터에 의존해야 하는 자율주행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데, 아직 지극히 원시적 수준에 있는 인공지능 기술 완성은 자율주행차 상용화를 위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그리고 초정밀 3차원 지도 제작 속도보다 노면 결빙과 도로 공사 등 주행 환경 변화 속도가 훨씬 큰 점을 고려하면, 구글의 자율주행 시스템이 과연 타당한 방식인지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소개한 체스 경기의 단 여섯 가지 규칙과 하늘의 별만큼 셀 수 없는 자율주행 시 각종 돌발 상황을 비교하면, 과연 언제쯤 자율주행 상업화가 가능할지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과거 정부 주도 기술개발사업을 보면 이른바 굵고 짧은 형태의 지원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번만큼은 가늘어도 좋으니 장기간 지원이 이루어지기를 절실히 바란다. 자율주행 시스템 전체가 아니라 자율주행에 필요한 핵심 요소 기술 개발에 집중하면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도 연구가 가능하며 오히려 적은 비용이 장기간 연구에는 훨씬 유리하다. 거액 연구비가 지원되는 때는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홍보 활동이 따르게 되고 결과적으로 대중 관심도도 비례해서 증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보통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가 요구되기 때문에, 개발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핵심 기술은 사오고 최종 결과물, 즉 시스템 구성에 지원금 대부분이 허비돼 기술적으로 남는 것은 별로 없게 되는 사례를 무수히 목도했다.
불과 15년 전만 해도 독일 자동차는 성능은 최고지만 연비는 최악이라는 비평을 들었으나, 요즘은 연비도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일등공신은 코먼레일 방식 디젤 엔진이며, 핵심은 초고압 연료 분사를 가능케 한 노즐 정밀 가공에 있다. 레이저를 이용해 쇠에 미세 구멍을 뚫는 기술을 완성해 연비는 물론이고 유해 배기가스도 획기적으로 저감시켰는데, 이렇게 미미해 보이는 기술 완성을 위해 10년이 넘는 연구 기간이 필요했다. 우리나라에 대비해 보면 대통령이 두 번 바뀌고 담당 공무원도 다섯 번쯤 바뀔 시간인데, 우리 연구 문화에서 이런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이미 남이 개발해 놓은 기술의 신속한 국산화를 위해서는 정부나 기업의 단기적이고 집중적인 지원이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기술개발을 위해서는 비록 그 규모가 작더라도 장기간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자율주행 역시 아마 대중 관심이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쯤에야 기술이 어느 정도 성숙될 것으로 예상한다. 자율주행 ‘기술개발’이 ‘기술개발 쇼’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최세범 KAIST 기계공학과 교수·한국자동차공학회 이사, sbchoi@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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