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강국 대한민국의 장비 산업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 이동통신사업자 발주량 급감과 고질적 가격 후려치기, 해외 수출 어려움 등으로 대다수 업체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국내 생태계가 파괴되면 결국 글로벌 업체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대책이 급하다.
10일 통신 업계에 따르면 지난 1분기 국내 이동통신사 설비투자(CAPEX) 규모는 9219억원으로 지난해 동기(1조2199억원) 대비 24.4% 급감했다. 3000억원 가까운 투자가 실종되면서 기가인터넷용 장비를 공급하는 일부 유선장비 업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개점휴업 상태다.
지난해 한국네트워크산업협회(KANI)가 발간한 ‘2013년 국내 네트워크장비 산업 실태조사’ 보고서(68개 업체 대상)에 따르면 내수시장 통신사 발생 매출은 52.8%에 이른다. 전체 매출 절반 이상이 통신사에서 발생하는 구조다. 통신사가 투자를 줄이면 중소 장비업체는 직접 타격을 받는다.
한 중계기 업체 임원은 “지난해부터 통신사 설비투자 규모가 감소하기 시작해 올해 1분기엔 신규 사업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며 “올해 통신사 전체 CAPEX는 지난해보다 더 큰 폭으로 감소할 것으로 보여 전망이 어둡다”고 털어놨다.
통신장비 시장 전체 규모도 줄고 있다. 네트워크장비 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5조1652억원이던 국내 네트워크장비 시장 규모는 2013년 4조5484억원으로 11.9% 감소했다. 롱텀에벌루션(LTE) 투자가 마무리되면서 향후 수년간 이 같은 감소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됐다.
수익성 악화를 견디다 못한 일부 업체는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올해부터 계속 인력을 줄여나가겠다는 업체도 적지 않다. 중견 규모 이상 기업 사이에서는 국내 시장에 기대를 버리고 해외로 눈을 돌리는 곳이 늘고 있다. 단품 위주 중소 업체는 거래처 확보와 현지 유지보수 문제로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국산 장비 유지보수에 제값을 주지 않고 납품가를 턱없이 깎아내리는 갑의 횡포는 더 심해졌다. 전반적 불경기가 이어지면서 예산절감에 나서는 기업이 구매정책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통신사는 반년도 안 돼 특정 장비 납품가를 두 차례에 걸쳐 총 30%까지 낮추라고 요구해 물의를 빚었다.
업계 관계자는 “발주사가 협력사와 동반성장하겠다는 상생 의지를 보이지 않는 이상 정부 지원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지금 상태가 이어진다면 수년 내 중소업계 대부분이 폐업하고 외국 업체가 국내 통신장비 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피해는 고스란히 국내 통신사업자에 돌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