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카드 단말기 교체를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스템을 모두 바꿔야 하는데 돈이 들어가고 더구나 IC카드는 결제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국내 대형 유통 가맹점주의 말이다. 금융당국이 보안강화를 목적으로 추진 중인 IC카드 전환사업에 적신호가 켜졌다. 정작 가장 시급히 IC카드 인프라로 전환해야 할 대형가맹점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오는 7월부터 신용카드 가맹점은 의무적으로 IC카드 단말기를 설치해야 한다. 마그네틱(MS)단말기를 보유한 기존 가맹점도 3년 이내에 교체해야 한다.
정부는 지난해 4월 IC카드 전환 대책 일환으로 보안이 취약한 마그네틱 단말기를 IC단말기로 모두 교체하는 대책을 내놨다. 사업 핵심은 대형가맹점이다.
결제비율이 월등히 높은 국내 대형 가맹점이 IC전환에 참여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곳의 대형가맹점도 인프라 전환에 나선 곳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금융당국의 보여주기식 대책에 협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대형가맹점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별도 설명회를 개최하고 시범사업까지 제안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금융당국은 체면을 구겼다.
금융당국은 카드사와 가맹점, 이용자로 얽힌 복잡한 산업구조를 감안해 무리한 IC 단말기 조기 전환보다는 결제정보 암호화에 따른 프로그램 개발과 보안 인증 표준 등 기술적 대비부터 순차적으로 추진하겠다고 계획을 순연했다.
한 가맹점 관계자는 “IC카드로 전환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이야기하고 투입비용이나 인프라 교체에 걸리는 시간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탁상행정의 표본”이라고 꼬집었다.
카드업계와 밴 업계도 대형가맹점 한 곳도 못 끌어들인 IC카드 단말기 전환 대책은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다며 자포자기한 상태다.
정부는 IC카드 전환을 보안강화 핵심으로 포장하며 대대적인 홍보 도구로 활용했다.
별도 기금 1000억원을 조성해 영세가맹점에 IC카드 단말기를 무상보급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앞뒤가 바뀌었다. IC카드 단말기 전환 핵심은 고객 정보유출 등을 막고 위·변조를 근절하기 위한 보안성 강화다. 월 2~3건 카드 결제가 이뤄지는 영세가맹점을 해커가 공격대상으로 삼을 리 만무하다. 결국 IC카드 전환 홍보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실효성 없는 보급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셈이다.
기금을 조성한 카드사도 금융당국의 졸속행정을 인정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고 하소연한다.
밴사 고위 관계자는 “대형가맹점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접촉을 수차례 했지만 이들에도 별도 혜택을 줘야 하는데, 대안 없이 교체하라고만 하니 과연 어떤 곳에서 전환을 하겠냐”며 반문했다. IC카드 전환 과정에서 금융위, 금감원 주무부처 인력은 2~3차례 교체됐고 그 누구도 열어보려 하지 않는 ‘판도라 상자’가 됐다.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