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SCI중심 출연연 평가제 혁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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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언장단(不言長短)이란 말이 있다. 남의 장단이나 우열을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황희 정승이 두 마리 소 중 어느 소가 일을 잘하는지 농부에게 물었더니 비록 가축일지라도 비교하는 것을 들으면 어찌 불평하지 않겠냐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남을 평가를 함에 있어서는 성급하지 말고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말이다.

그런데 공공기관에서는 이 불언장단 미덕이 예외로 작용한다. 정부 재정 지원을 받는 공공기관, 준정부기관, 기타공공기관 등은 경영평가, 기관평가를 받고 있다. 공공기관 등의 우열을 가리는 이유는 기관운영 책임을 물어 공익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황희 정승 일화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교훈은 평가에서 불평이나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합리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현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출연연은 국가 기간산업 발전의 모멘텀(momentum)이자 우수인재 요람으로 주목 받아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대기업을 중심으로 민간 R&D가 활성화되면서 역할과 기능이 축소되고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게 됐다.

성과에서도 대학, 기업과 차별성이나 외부 활용도가 저조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를 반영해 평가도 양에서 질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다.

출연연은 연구기관과 연구지원기관으로 나눌 수 있다. 연구기관과 달리 지원기관은 인프라(시설·장비), 정책, 인력 양성 등을 주요 기능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 평가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반영되지 않고 종종 동일한 지표 달성도로 비교돼 왔다.

최근 미래창조과학부가 연구지원기관에 대한 논문성과 평가를 지양하는 정책을 검토 중이다. 매우 고무적이다. 향후 지원기관이 논문 쓰는 일에 열중하지 않고 더 나은 서비스 활동에 집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보다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평가를 위해서는 몇 가지 추가 개선이 필요하다.

먼저 우열의 잣대를 기관에 따라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 초등학생과 대학생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안으로 유사한 기관별로 그룹을 나누거나, 경영성과 배점 자율성을 확대하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기관 현실에 적합한 성과지표 개발도 필요하다. 현행 기반 지표는 만족도, 가동률, 서비스 건수 등으로 국한돼 있어 다양한 성과를 반영하기 어렵다. 기관 활동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있어야 한다. 특히 장비기반 서비스 기관에 대해서는 노후장비 교체나 첨단장비 도입을 위한 장비구축적립률 등을 지표로 반영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관장 책임경영제를 확실히 해야 한다. 평가결과에 따라 우수한 기관장은 연임을, 미흡한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형태로 운영돼야 한다.

얼마 전 모 케이블 방송사 드라마 미생(未生)이 인기를 끌었다. 미생은 바둑에서 완생(完生)할 여지를 남기고 있는 돌을 의미한다.

출연연은 그동안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미생’처럼 따가운 눈총을 받아왔다. 이는 외부 기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우리 스스로가 우물 안에서 보이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이제는 돛을 펼치고 신대륙을 찾으러 먼 바다로 나아가야 할 때다.

현장의 다양한 의견수렴을 통해 합리적인 평가제도가 정착돼 출연연이 창조경제를 이끄는 ‘완생’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이재영 나노종합기술원장 y561010@nnfc.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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