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전격Z작전’이라는 인기 TV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이 손목시계에 대고 “키트”라 부르면 어디선가 검은 자동차가 주인님을 모시러 나타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독일 BMW는 지난달 CES에서 이런 꿈같은 광경의 실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했다.
진화하는 자율주행 기술 덕분이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범죄자를 미리 찾아내던 시스템도 현실로 다가왔다. 미국 팰런티어테크놀로지는 ‘예측 치안(Predictive Policing)’이라는 개념을 실제로 수사 현장에 적용했다.
영화 속 세 명의 예지자 역할은 머신 러닝으로 무장한 컴퓨터가 맡는다. 이해하기 어렵고 개인 삶과는 무관할 것만 같은 기술의 발전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혁신을 실현시키며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세계의 우수 기술 인력들은 이제 대기업이나 대학 연구소를 벗어나 기술 기반 기업을 직접 창업한다. 첨단 기술로 세계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 기술기반 스타트업들은 상황이 어떨까. 혹자는 팰런티어테크놀로지나 마크 저커버그, 제프 베조스 등이 투자한 인공지능 기업 ‘비캐리어스’처럼 세계적 수준의 연구자와 엔지니어가 무더기로 모여 있는 외국 회사를 언급하며, ‘우리 기업의 소프트웨어 기술 수준이 그들과 비교할 수 있겠냐’는 사대주의적 회의론을 편다.
일각에선 아직 궤도에 오르지도 않은 회사에 성급하게 돈 벌 궁리를 하도록 하고 그렇지 못하면 가치 없는 도전으로 치부하며 창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러다 보니, 오롯이 연구개발에만 집중하며 한 우물을 파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기업이 주목받지 못하고 투자나 지원에서 멀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안정적 자리를 박차고 꿈을 찾아 창업의 길로 뛰어드려는 우수 연구자나 엔지니어의 발목을 잡는다. 과연 우리나라 팀의 기술 수준이나 가능성이 낮은 것일까? 기술 수준 비교를 그렇게 간단히 할 수 있을까?
물리학에서의 아인슈타인 통일장 연구와 같이,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연구라면 초특급 연구자가 떼로 뭉쳐 있는 비캐리어스 같은 회사가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자적 영역에서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축적해 가며 기술적 난제에 도전하는 우리 기업들이 곳곳에 있다.
딥러닝 분야를 예로 들면, 이미지 인식 기술을 다루는 ‘클디’는 꾸준히 관련 연구 결과를 쌓아 작년 세계 권위의 이미지 인식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바 있다.
제약이나 보험과 같은 영역에 이런 기술을 적용시키며 실질적 결과를 만들어 가는 기업도 우리나라에 존재한다. 다른 기술 영역에서도 좁은 영역에 깊이를 더하며 성장하는 기업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기업이 배고픔을 견디며 훌륭한 결과물을 만드는 상황이 자생적으로 활발히 생겨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당장 기술을 팔아 얼마나 돈을 벌지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들의 연구가 열매를 맺었을 때 얼마나 큰 파급 효과로 삶을 편리하게 만들지에 공감하며, 믿고 투자하고 기다려 주는 노력이 병행돼야만 한다.
다행히 중소기업청 ‘민간투자주도형 기술사업화 지원(TIPS)’ 프로그램과 같이 기술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중점 지원하는 제도가 활성화되고 있다. 민간 투자자 중에도 기술 기반 창업의 중요성에 주목하며 힘을 모으는 곳들이 늘고 있다.
창업가나 투자자·지원 기관 모두 첫 술에 배부르기는 어렵다. 기술기반 기업은 도전을 시작했다면 꾸준히 끝까지 한 우물을 깊게 파내려가야 한다. 그 영역에서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수준이 돼야 제대로 된 혁신을 만들어 내며 이후 단계를 풀어 나갈 수 있다.
투자자도 이런 성과가 만들어지는 환경의 수동적 참여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돼 꾸준히 믿음을 갖고 기술기반 기업에 투자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 많은 기술기반 기업이 창업하고, 그들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헌신하는 미래가 도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기준 케이큐브벤처스 파트너·이사 kijun@kcubeventur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