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 함께하는 ‘국민연구소’.”
신용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이 당차게 끌고 가는 슬로건이다.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는 표준연이 향후 나아가야 할 좌표를 제시한 셈이다. 지난해 취임식 때 처음 꺼내 놨다.
그동안 출연연은 국가 R&D를 수행하며 주위의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됐을지는 몰라도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친숙한’ 연구소는 아니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 처음으로 ‘국민에 다가가는 연구소’를 선언했다. 올해가 그 원년이다.
신 원장은 표준연 공채 1호 여성연구원 출신이다. 출연연 첫 여성 기관장으로 기록된 정광화 제9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현 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이 뽑았다. 그동안 억척같이 연구하고 대외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신 원장은 국내 진공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최고 전문가지만, 처음 보는 이들이 스스럼없이 다가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특별한 꾸밈이 없다. ‘전문가는 스스로 포장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게 강점이다. 때론 이물 없는 동네 아줌마 스타일로 다가선다.
“실험실서 한우물만 파는 것도 좋지만, 가끔씩 주위를 돌아봐야 한다. 옆에 수도관이 있는지도 봐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뭐로 파는지…. 예를 들어 포클레인으로 땅을 판다면 아무리 삽질을 잘해도 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 원장의 R&D에 대한 지론이다. 신 원장으로부터 R&D 계획과 소신, 경영방침 등에 대해 들어봤다.
-‘국민연구소’라는 얘기를 꺼내 놓은 이유가 뭔가.
▲아직까지 국민과 친숙한 국민 연구소라 할 만한 연구소는 없었다. 과학기술계 연구소가 국가 발전에 기여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전문가 영역이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 수준과 기대치가 높아진 만큼, 이제 연구자도 전문 용어 대신 쉬운 말로 우리 일을 소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대환경에 걸맞은 임무와 역할을 재정립하고, 각 분야의 국가대표 연구기관으로서 위상에 걸맞은 성과도 내놔야 할 것이다. 이제 제 실력만 주장하던 연구소에서 벗어나 국민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출연연이 돼야 할 것이다.
-여성기관장으로서 가지는 의미와 마인드 등에 대해 조언해 달라.
▲여성이라고 해서 배려받거나 덜 한 게 없다. 오죽했으면, 애가 아파 우는데 떼놓고 출근한다고 ‘사람같지 않다’는 말까지 들었을까. 왜 마음이 아프지 않겠나. 하지만 일은 일이고 집은 집이다. 애들 교육에도 엄마가 전문적인 직업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다 잘 하는 슈퍼우먼이 될 수는 없다. 일부는 포기해야 한다고 본다.
여성 연구원들에게 조언한다면 전문연구분야 수준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각, 사고, 경험이 필수다. 여성이 업무에서는 남성에 뒤지지 않지만 교류나 인맥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시간을 투자하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네트워크를 강화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지난 40년에 대한 평가와 향후 비전은.
▲40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5위권의 표준기관으로 발전하며 측정표준 선진기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정부 기관평가에서도 표준연은 줄곧 우수기관으로 선정되는 등 모범연구소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새로운 40년을 맞는 표준연은 모범연구소에서 한 단계 성장한 국민연구소가 되길 원한다.
실행방안은 다섯 개다. 초일류, 융합연구, 사회이슈 대응, 일류 중견중소기업 육성, 우수 연구자 집결 기관 지향 등이다.
-올해 눈길을 끄는 경영계획 및 방침이 있나.
▲표준연은 모범적이지만 역동성이 부족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연구원 복도를 지나가면 거의 연구원을 만나기 어렵다. 각 실험실에 들어앉아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 면에서 보면 선비생활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복작거리면서 토론하고 그래서 아이디어도 샘솟고 하는 그런 역동적인 분위기가 너무 아쉽다.
매달 1회씩 전 직원을 모아 전체가 소통하는 ‘KRISS통’이라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경영자료를 있는 그대로 다 보여준다. 이해를 구할 것은 구하고 도움받을 것은 받을 것이다.
-정부 2차 경영정상화와 관련한 대응은.
▲성과급 차등 지급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박사후과정(Post-Doc) 우수자를 선발해 시행하려 한다. 정부가 제시한 투스트라이크아웃제 도입은 생각할 것이 많아 검토가 더 필요하다. 최하위 평가 두 번 받았다고 무조건 아웃시키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어려운 테마를 가진 연구원은 결과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정성적으로 평가해야 할 부분이 분명 있다. 정부가 성실 실패를 용인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참으로 맞지 않다. 이렇게 되면 도전적인 과제는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못하게 돼 있다. 정성적인 평가와 부서장 평가 등을 좀 높여야 하지 않나 싶다.
-올해 중점을 두고자 하는 연구 분야와 이슈가 될 연구 분야가 있다면.
▲의료융합측정표준센터를 중심으로 의료기기 측정표준 확립 연구를 강화하고 있다.
일본 원전사고, 세월호 침몰, 씽크홀 등으로 안전에 대한 측정표준 연구가 보다 확대될 것이다.
비파괴, 비침습 구조물 안전진단 및 모니터링, 재난탐지 및 복구 등에 필요한 측정기술 등의 수요가 높아지리라 본다.
-지난해 만든 창업공작소 성과와 새해 계획에 대해 설명해 달라.
▲현재 활발히 운영 중이다. 지난해에만 KRISS 창업공작소의 도움을 받아 5명이 창업에 성공했다. 올해도 많은 기술지도가 이루어지고 있어 10개의 창업기업이 배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올해 1호 창업기업 배출 시기는 3월 정도로 예상된다.
지난해 OLED 디스플레이 및 조명 생산업체인 파인에바도 만들어졌다. 기술집약형 연구원 창업회사다. 한국과학기술지주(KST)에서 기술력과 사업성공 가능성을 인정받아 5억원 투자금도 유치했다. 잘 될 것으로 기대한다.
-중소기업 지원 관련 성과와 전략은 무엇인가.
▲측정관련 인력, 기술, 장비 서비스를 중소기업에 원스톱, 토털 솔루션 형식으로 지원한다. 중소기업지원센터를 중심으로 히든챔피언 육성사업을 유지 강화시킬 예정이다. 5년간 5개의 히든챔피언 육성이 목표다. 사업초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산업체의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중소기업이 가진 기술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표준연의 고유 업무가 성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장기적인 호흡을 유지할 예정이다.
-올해 R&D 화두는 ‘융·복합’이다. 현재 추진사항과 향후 계획은.
▲측정표준을 연구하는 기관 특성상 융합연구에 가장 적합하다. 예를 들어 ㎏의 신정의로 각광받고 있는 와트발란스 연구는 질량표준뿐만 아니라 중력표준, 전기표준, 시간표준, 길이표준이 융합되어야만 진행될 수 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연구 분야가 복잡해질수록 이러한 융합연구의 비율은 자연스레 높아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측정 분야에 대한 도전적이고 역동적인 연구시도가 필요하다.
◆표준연 2015 주요 R&D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올해 국민의 건강 및 안전에 우선을 둔 R&D, 신수요 대응 및 첨단산업을 선도할 측정기술 개발에 공을 들일 계획이다. 이들 분야에서 내놓을 만한 성과가 터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크게는 3개 축이지만 세부적으로는 10여개 기술 개발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국민의 건강 및 안전과 직결되는 분야로 방사선 및 나노 안전성 관련 기술개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현재보다 더 정교하고 정밀한 의료방사선 측정표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의료 방사선·방사능 및 중성자 측정표준을 확보해 진단·치료 방사선과 방사선 방호, 환경방사능, 중성자선 측정에 요구되는 국가표준을 확립할 계획이다. 또 공공 시설물 이상 징후 비파괴 탐지와 나노 안전성 평가의 엄격한 기준을 제시할 계획이다.
신수요 대응 측정표준기술로는 디스플레이 기판 두께 등을 재는 대형 3D 측정시스템과 전자파 측정 광센서, 국가 사업인 스마트 그리드 구축에 없어서는 안 될 양자전력 측정시스템 등을 개발한다. 또 초미세 힘표준 소자, 멀티모달 촉각센서, 대용량 힘표준의 기반이 되는 용량 1MN(메가뉴턴, 힘의단위) 실하중 힘표준기, 초거대 산업 측정 인프라인 50MN 빌드업 힘표준기 등도 올해 기술 개발 목표로 잡아놨다.
특히 3D측정시스템은 디스플레이의 두께 변화를 수 ㎚수준의 반복도로 측정, 50m 범위 내에서 반복도가 0.01m 이하로 측정이 가능하다.
첨단산업 부문에서는 두 가지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먼저 국가기간 산업인 최첨단 반도체, 디스플레이 핵심인 초박막 산업을 위한 원천 측정 및 표준화 기술 개발 필요성에 따라 오는 2018년까지 초박막 공정 측정 표준 개발이 목표다.
올해는 화학공정 실시간 정량분석 시스템 시제품과 끓는점을 이용한 증기압측정기술, 증기압 측정 절차서, 시드 입자 측정 및 제어기술, 펌프 에너지 효율성 평가기술 등을 중점 개발한다.
또 8세대 디스플레이 원판유리 제조공정 핵심 측정기술과 이송 중인 대면적 유리기판 두께 변화 측정기술이 올해 중점 개발된다.
세부적으로는 1000㎜/s의 이송속도와 2.5~5도 경사 조건에서 두께 반복 1㎚ 분해능을 확보할 계획이다. 또 차세대 편광필름 두께 측정을 위한 원천기술 확보에서 나설 방침이다. 순조롭게 이 기술이 개발되면 올해 하반기 디스플레이 측정 및 검사 분야 전문기업과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신용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은?
여성 과학기술인 출신으로 대외활동력이 탁월하다. 최근엔 1주일에 8~9회, 대전-서울을 왕복하며 무리하게 업무를 챙기다 감기몸살로 고생했다.
현재 맡고 있는 직책만 13개. 규제개혁위원, 국가과학기술심의회 위원, 뿌리산업발전위원, 국재재정사업평가 자문위원, 한국연구재단 비상임이사, 원자력안전기술원 비상임이사,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비상임이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한국진공학회 이사, 한국물리학회 평의원 겸 미래비전위원에 표준과학연구원장까지 엄청나다. 국제무대에선 국제표준화기구(ISO) TC112 프로젝트 리더 및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체질화돼 있다고들 평한다.
1961년생. 서울중앙여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서 석사학위까지 했다. 박사학위는 물리학 전공으로 충남대서 받았다.
국내 내로라하는 진공측정 전문가다. 유학을 준비하던 1984년 연세대 대학원 3학기 때 15대 1의 경쟁을 뚫고 표준연에 공채여성 연구원 1호로 발을 들여놨다. 당시 표준연 진공측정연구센터를 이끌던 정광화 현 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이 선발했다.
국가연구개발사업 기초원천전문위원회 위원, 나노기술조정위원회 위원, 미래융합기술 위원, 국가우주위원회 위원,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2012년부터 2년간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제9대 회장을 지냈다. 8대 회장은 민병주 새누리당 의원이었다.
신 원장은 겉으로 보기엔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는 털털한 동네 아줌마 스타일이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간단치가 않다.
철저한 자기관리형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 지난해 대면적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선형 상·하향식 증발증착기술로 파인에바를 창업했는데 이 과제 사업 책임자가 신용현 원장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모를 우려 때문에 창업 때 단 한 주의 주식도 갖지 않았다.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m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