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기름값 인하압박에 들끓는 정유업계

정부가 또 다시 정유·주유소 업계에 기름값 인하를 종용하고 나섰다. 지난 2011년 국제 유가가 치솟던 때의 상황이 그대로 재연되는 모양새다. 당시 정유사는 강도 높은 정부 압박에 리터당 100원 인하로 대응했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정유·주유소 업계는 높은 유류세로 인해 인하 효과가 상쇄되고 있다고 강하게 맞받아 치고 있다. 소비자들의 시선도 꿈쩍하지 않는 세금으로 향하고 있다. 정유사 이윤이 높지 않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정부가 유류세 인하 여론이라는 역풍을 맞게 된 셈이다. 유가가 높으나 낮으나 변화 없는 정책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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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 업계, 고유가때와 상황 다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9일 대한석유협회와 주유소협회 등 석유·액화석유가스(LPG) 유통 업계와 간담회를 개최했다. 국제 유가 하락분을 국내 석유 제품과 LPG 판매 가격에 충분히 반영해 달라고 관련 업계를 소집한 자리다. 업계는 이를 지난 2011년 고유가 당시 정부가 기름값 인하를 위해 업계를 압박한 상황의 재연이라고 보고 있다.

당시 두바이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에서 120달러로 치솟았고 보통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800원대에서 2000원대까지 올라갔다. 이명박 대통령의 “기름값이 묘하다”는 발언에 이어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정유사·주유소 회계 장부를 직접 들여다보겠다고 말했다. 또 공정위는 주유소 원적지 관리 담합 조사에 나서는 등 업계를 향한 정부의 압박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를 더했다. 정유 업계는 결국 그해 4월 휘발유와 경유값을 한시적으로 리터당 100원 내리기로 결정하며 상황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현재 정유 업계 반응은 ‘추가 인하는 불가능하다’로 요약된다. 유가 급락과 석유 제품 수요 부진 등으로 정유 업계 영업손실은 사상 최초로 1조원을 넘어섰다. 현재 유통 구조 또한 높은 수준의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는 과거 고유가 대책으로 알뜰주유소·석유전자상거래 등 사실상 시장에 직접 개입해 석유 제품 가격 인하를 유도했다. 삼성토탈의 알뜰주유소 물량 공급과 함께 석유 제품 수입사에 수입 부과금 면제 등을 주는 현물 전자상거래를 개시하면서 석유 제품 가격은 리터당 최고 70원 이상 하락한 것으로 추산된다. 정유 업계도 이에 맞춰 국내 공급 가격을 계속 인하했고 이는 또 다시 주유소간 가격 경쟁으로 이어진 상태다. 여기에 오피넷 등에 국제 가격과 국내 공급 가격을 공개하는 상황에서 큰 폭의 이윤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 업계 주장이다.

실제 지난해 정유사의 국내 석유 제품 판매를 통한 이윤 폭은 크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정유사는 역내 석유 제품 거래 시장인 싱가포르 현물시장의 국제제품가격(MOPS)을 기본으로 매일 국내 가격을 결정한다. 정유사의 세전 공급가격은 지난해 주간단위 기준으로 싱가포르 국제제품가보다 평균 85원가량 높았다. 세전 가격에 원유 도입 시 발생하는 관세 3%, 리터당 16원의 수입 부과금, 환경 기준에 맞추기 위한 스펙 조정 비용과 정유사별 각종 마케팅 비용, 수급·수송·저장비용 등 유통에 필요한 비용, 정유사의 이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를 감안한 정유사 내수 영업이익은 리터당 7~8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정유 업계 관계자는 “정유사의 영업이익률은 0.5%인데 이는 국내 신용카드사 수수료율보다 낮은 상황”이라며 “완전 개방 시장인 우리나라 석유 제품 시장 구조상 폭리를 취할 수 없고 만약 이윤이 높다면 해외 정유사나 수입사의 내수 시장 진출이 활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유소 업계도 무리한 가격 인하는 불가능하다고 항변하고 있다. 산업부는 지난 8일 기준으로 서울시 관악구내 주유소의 보통 휘발유 최고 가격과 최저 가격의 차이는 리터당 759원, 경유는 구로구의 최고 가격이 최저 가격 대비 696원 높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가격 차이가 크기 때문에 현재 다수 주유소에서 가격 인하 요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 주유소 업계는 현재 주유소 판매 가격을 보면 이를 일반적 상황으로 여기기에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주유소 이윤은 정유사나 석유 대리점으로부터 공급받은 가격에 임대료·인건비 등을 붙여 공급가격을 결정하기 때문에 사업장 상황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서울시 역삼동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한 점주는 “주유소를 다수 운영하는 사업자는 구매력이 우수해 조금 더 싼 가격에 제품을 공급받을 수 있고 점포 입점 형태 등에 따라 가격 차이가 발생한다”면서 “일부 고가 정책을 유지하는 주유소를 비교 대상으로 삼으면 올바른 비교가 불가능할 뿐더러 그런 주유소가 부당하게 이익을 취한다면 소비자 선택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정유·주유소 업계의 현재 상황과 추가 인하 여력이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 인식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업계를 압박하고 나선 것은 소비자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름값을 건드리는 것이 홍보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에너지 업계 한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유가 하락이 국내 에너지 가격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해 보라고 발언하자 산업부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추가 인하 여력이 없는 정유 업계를 압박한 것은 결국 퍼포먼스성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화살은 유류세로 쏠린다. 주유소 판매 가격은 정유사가 공급한 세전 석유 제품 가격에 유류세가 붙는 구조다. 최근 유가 하락으로 기름값에서 석유 제품 가격은 내려가고 있지만 유류세는 변동이 없다. 전체 가격에서 유류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보니 소비자가 느끼는 가격 인하 효과가 줄어들고 있다.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한 보통 휘발유 평균 공급 가격은 지난해 12월 5주째 리터당 508.09원까지 내려갔다. 국제 유가가 본격 하락하기 시작한 지난해 6월초 공급 가격은 861.77원으로 이 기간 41% 하락했다. 이 공급 가격에 유류세를 포함시키면 가격 인하폭은 21.9%로 낮아진다.

유가 하락으로 기름값에서 제품 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할수록 고정된 유류세 비중은 상승하고 이는 가격 인하 효과를 줄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리터당 교통세(529원), 교육세(교통세의 15%), 주행세(교통세의 26%) 등 고정 세금에 부가세(세후 전체 가격의 10%)까지 붙어 900원을 상회한다. 휘발유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12월 기준 56%로 상승했고 현재 1300원대 주유소가 등장한 것을 감안하면 유류세 비중은 60%를 넘어섰다.

김문식 주유소협회 회장은 “유류세를 인하하지 않으면 휘발유 가격은 1300원 이하로 떨어지기 힘들다”며 “정부가 국제 유가 하락에 따른 혜택을 서민들에게 주려면 유류세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유가 100→50달러, 5년째 같은 정책이라니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수준이던 5년 전에 수립한 고유가 정책을 50달러로 떨어진 지금도 그대로 시행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산업 정책이라는 것이 있는지 의문케 하는 대목입니다.” 정부가 최근 국제 유가 하락에 따라 기름값을 내리라고 업계를 압박하고 나선 것에 대한 에너지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이는 국제 유가가 1년 새 반토막이 났지만 기름값은 내려가지 않는다는 소비자들의 아우성에 대해 정부가 모든 책임을 정유사와 석유유통 업계로 돌리고 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정부는 최근 석유 및 LPG 가격 동향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알뜰주유소 확산과 전자상거래 활성화, 혼합 판매 허용 등 경쟁 촉진을 통해 국내 석유가격 인하를 유도하고 가격 결정 투명성을 제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2011년 고유가 대책으로 제시한 가격 인하 정책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의미다. 정부의 3대 석유유통 시장 경쟁촉진 정책은 기름값에서 20% 비중을 차지하는 정유사 정제 이윤과 주유소 유통 이윤을 줄이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덩치가 더 큰 유류세와 고정비인 원유 가격을 손대지 않으려고 하니 운신의 폭이 적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정책이 수립됐을 당시는 국제 유가가 급등했고 석유 제품 수출 시장이 살아있었을 때다. 정유사는 지난 2012년 석유 제품을 단일품목 최고 수출액으로 등극시키며 그 해 ‘무역의 날’에서 각종 수출탑을 휩쓸었다. 정부가 3대 유가대책을 추진해 내수 시장에 개입했지만 견딜만 했다. 내수는 포기하더라도 매출의 60%를 넘는 수출 실적이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제 유가가 급락하며 수출 시장이 무너졌다. 지난해 석유제품 수출액은 전년 대비 3% 감소했다. 국내외 정제 시설이 공급 과잉을 유발하자 각국의 저이윤 수출 경쟁이 가속화됐기 때문이다. 특히 거대 시장인 중국은 지난 2012년 이미 하루 1154만7000배럴의 정제 시설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석유 제품 자급자족이 가능해졌다.

정유 업계는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재고평가 손실을 떠안고 수출 시장에서 고전하며 최악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정유 4사의 정유사업 적자 규모는 지난해 사상 처음 1조원을 넘길 전망이다. 지난해 원유 재고 손실은 2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11년과 판이하게 달라진 정유 업계 상황을 ‘나 몰라라’하는 정부 정책에 볼멘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유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지금은 정부가 기름값을 조금 더 내리는 정책으로 소비자들에게 생색 낼 시기가 아니고, 정유 업계가 겪고 있는 수출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산업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며 “업계 내부에서는 최근 ‘정유 산업 붕괴 우려’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고 전했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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