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한풀 꺾인 2007년 9월 4일 화요일.
정보통신부 마지막 수장(首長)인 유영환 장관(현 한국투자증권 부회장)이 이날 오후 2시 정통부 14층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갖고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유 장관은 노무현정부의 6개월 시한부 장관이라는 숙명을 안고 출발했다. 이듬해 2월 말 차기정부가 출범하기 때문이다.
유 장관은 취임사에서 “모든 정책은 국민 편익을 높이고 소비자 선택권을 높이는 데 최우선을 두고 정보통신산업 발전에 기여하며, 이해 관계자 간 갈등을 조정하는 데 역점을 둬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유 장관은 이어 “지금까지 추진해 온 정책과제를 잘 마무리함으로써 새로운 IT 발전 방향을 의제화해 차기 정부에 이양하는 데 전념하고자 한다”면서 △방송통신 융합 추세에 적극 대응 △통신규제 로드맵 마무리 △IT839 상용 서비스 정착 △정보화 역기능에 강력 대응 △국가 간 IT협력 △우정서비스 품질 개선 등을 정책과제로 제시했다.
유 장관은 정통부 직원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공직자의 엄격한 책임과 자기관리가 필요한 시기”라며 “변화기를 틈타 할 일을 뒤로 미루거나 줄서기와 조직의 인화를 해치는 편 가르기가 있다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당부했다.
유 장관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더 큰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며 “항상 국민을 중심에 두고 국민이 기대하는 역할을 다하도록 지혜와 정성을 다하자”고 주문했다.
유 장관은 이날 오전 10시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신임 유 장관은 고려대 경영대를 졸업한 후 제21회 행정고시에 최연소자로 합격해 1978년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96년 정통부로 옮겨 기획총괄과장, 정보기반심의관, 공보관, 국제협력국장, 정보통신정책국장을 역임했다. 정책국장 당시 IT839전략을 수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04년 1월 부처 간 국장급 인사교류제 도입에 따라 1년여 동안 산업자원부 산업정책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했다. 정통부 정보통신정책국장 자리에는 산자부 최준영 국장(한국산업기술대 총장 역임)이 이동했다.
그러나 잘나가던 유 국장에게 시련이 닥쳤다. 정통부로 복귀했지만 보직이 여의치 않자 그는 사표를 내고 2005년 2월 동원금융지주 전략담당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운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人生事 塞翁之馬)였다. 그는 2007년 9월 4일 민간기업 경영진에서 정통부 차관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정통부에서 1급을 거치지 않고 국장 출신이 차관에 발탁된 일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더욱이 당시 정통부 본부에는 행시 21회 동기인 석호익 실장(현 통일IT포럼 회장)과 이성옥 실장(한국정보산업연합회 부회장 역임) 등 1급이 두 명이나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쟁쟁한 부 내 고시 동기를 제치고 민간기업에 나가있던 유 차관이 발탁된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노준형 장관(현 김앤장 고문)의 강력한 추천 덕분이었다.
차관 발탁과 관련, 노준형 전 장관의 회고.
“석 실장이나 이 실장 모두 인품이나 능력 면에서 훌륭한 분입니다.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석호익 실장을 차관으로 강력히 추천하는 전임 장관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차관은 장관의 보완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방송통신 융합, 한미 FTA, 조직개편 등 다른 부처와 협상력이 필요해 유 차관을 청와대에 추천했습니다.”
노 전 장관과 유 장관은 고시 21회 동기로 기획원 시절부터 트레이닝을 같이 받았고 오랫동안 호흡을 같이 한 사이였다. 노 전 장관과 유 차관은 실제로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해 궁합이 잘 맞았다. 노 전 장관은 자신의 후임으로 유 차관을 추천했다.
노 전 장관의 계속된 증언.
“후임 장관으로 유 차관을 추천한 것은 두 가지 이유였습니다. 우선 강단 있고 논리싸움에 지지 않는데다 유 차관이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17대 대통령 역임)와 대학 동문이어서 연결고리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다음은 참여정부 IT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고 잘 마무리할 적임자로 외부 인사보다는 내부 인사가 바람직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해 8월 8일 사의를 표명한 노준형 장관의 후임에 유영환 차관을 내정했다.
박남춘 청와대 인사수석(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은 이날 오후 3시 30분 청와대 브리핑에서 “정통부 장관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해 8월 30일 오전 10시.
유영환 장관 내정자는 이날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정통부의 정책기조를 밝혔다. 청문회는 임인배 과기정위원장(현 안양대 산학협력부총장)의 개회선언과 유 장관 내정자의 선서, 모두 발언, 의원들과의 질의 답변 순으로 오후 4시까지 진행됐다.
유 장관 내정자는 “통신시장 경쟁을 촉발시켜 요금인하가 이뤄지도록 재판매법을 입법 추진하고 있다”면서 “재판매법을 도입하려는 것도 통신시장 도매규제 정책으로 전환해 소비자 후생을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회는 9월 3일 과기정위 전체회의에서 유 장관 내정자의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했다.
유 차관이 장관으로 발탁됨에 따라 공석인 차관에는 김동수 정책홍보관리본부장이 승진, 임명됐다.
김 차관은 8월 31일 오전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김 차관의 증언.
“차관 내정은 유영환 장관으로부터 사전에 통보받았습니다.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고 노 대통령과 티타임을 가졌습니다.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 차관은 이날 오후 정통부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갖고 본격 업무에 돌입했다.
김 차관은 취임사에서 “통신시장 경쟁을 촉진할 통신규제 로드맵을 차질 없이 추진하고 방송통신 융합에 대응하기 위한 법과 제도 기반을 정비해 나가자”며 “개인정보보호를 강화하고 인터넷 포털의 책임성을 확보하며 IT839 전략을 마무리하는 일도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우리의 숙제”라고 강조했다.
신임 김 차관은 청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행정고시 22회로 공직에 입문, 정통부에서 잔뼈가 굵었다. 정통부에서 정보기반심의관과 감사관, 정보통신진흥국장 등 정보통신 관련 주요 직위를 두루 역임했다. 정보통신진흥국장 재직 시 초고속인터넷과 IMT2000 등 신규 통신서비스 도입과 활성화, 한미 통신 협상과 한·EU 통신장비 조달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진대제 장관(현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 시절 3년여 정보통신진흥국장으로 일해 장수 국장이란 기록을 남겼다.
그해 9월 17일.
정통부는 차관 승진에 따른 후속인사를 단행했다.
공석인 정책홍보관리본부장에 유필계 정보통신정책본부장(현 LG유플러스 부사장)을, 미래정보전략본부장에는 강대영 통신전파방송정책본부장(현 SK텔레콤 고문)을 각각 임명했다.
또 통신전파방송정책본부장에는 이기주 전파방송기획단장(현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정보통신정책본부장에는 설정선 정보통신협력본부장(현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 부회장), 정보통신협력본부장에는 김대희 주미대사관 참사관(현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전파방송기획단장에는 송유종 재정기획관(현 산업통상자원부 감사관)을 각각 임명했다.
이 무렵 정국은 이미 대선 체제로 접어든 상태였다.
한나라당은 그해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17대 대통령 후보로 확정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이보다 늦은 그해 10월 15일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현 새정치민주연합 고문)을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그해 11월 17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그해 11월 21일.
참여정부 ‘전자정부’ 최대 역점사업인 제2정부통합전산센터가 광주시 서구 풍암동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준공식에는 유영환 정통부 장관과 염동연(열린우리당 사무총장 역임), 정동채(문화관광부 장관 역임, 현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대통합민주신당 국회의원, 임우진 광주시 행정부시장, 입주기관 관계자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광주 정부통합전산센터는 정통부의 정부 통합전산환경 구축사업의 하나로 2458억원이 투입됐다. 부지 4만2700㎡에 지하 2층, 지상 5층, 연면적 3만3696㎡ 건물에 각 부처의 서버 1555대를 비롯해 3500여대의 전산장비를 완비해 완벽한 보안체계를 구축했다.
광주 정부통합전산센터는 대전 소재 제1정부통합전산센터로 이전하지 않은 건설교통부·기획예산처·법무부·국세청 등 24개 중앙부처의 정보시스템을 통합, 구축했다. 2006년 2월에 착공해 연인원 12만여명이 동원돼 2007년 6월 완공했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 16일.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지상파DMB가 국제표준으로 채택됐다. 한국 기술의 쾌거였다. 지상파DMB는 그해 5월 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ITU 방송연구반에서 만장일치로 표준안으로 채택된 후 191개 회원국 회람을 거쳐 12월 15일 새벽 ITU 국제표준으로 최종 확정됐다. 이에 따라 지상파DMB는 우리 방송기술로는 최초로 2005년 7월 유럽전기통신표준협회(ETSI) 표준 채택에 이어 국제표준으로 인정받는 개가를 올렸다.
당시 우리나라 지상파DMB 단말기는 780만대가 보급됐고 독일, 바티칸, 이탈리아, 가나, 인도네시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캐나다 등 11개국에서 실험방송을 진행했다.
그러나 정통부를 향한 최악의 먹구름이 마치 태풍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정부조직개편이었다. 정통부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야 했다. 그 최종 결정권자는 미래권력인 대통령 당선인이었다.
IT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