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ISO 26262 전면 도입, 車 산업 선진화 계기

현대차가 ISO 26262를 내년부터 전면 도입하기로 하면서 국내 자동차산업 생태계에 ISO 26262 시대가 열린다. 그동안 해외 완성차에 납품하는 부품 업체만 해오던 ISO 26262 대비를 이제 국내 자동차 업계 전체가 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그만큼 자동차 산업계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클 수밖에 없다. 국내 자동차 산업이 한 단계 도약하는 선진화 계기를 마련하는 한편, 로봇이나 우주항공 등 연관 고부가가치 산업 경쟁력 강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예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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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부품 오류를 줄여라…ISO 26262 없인 부품 수주 어려울 수도

현대차가 ISO 26262를 전면 도입하기로 한 것은 자동차에 들어가는 전장부품의 중요성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차에서 차량 내 전장부품 원가 비중은 2010년 32%였으나 신형 제네시스 등 최근 출시한 고급차를 중심으로 50%에 육박하는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현대차보다 앞서 ISO 26262를 도입한 독일 자동차 업계는 2010년 전장품 비중이 51%에 달했다. 지금까지 자동차에서 기계공학 중심의 안전개념이 주를 이뤘다면, 이제는 전장부품 중심의 안전개념으로 패러다임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ISO 26262를 도입하는 배경에는 전장부품의 ‘품질확보’가 놓여있다. 기계부품과 달리 전장부품은 ‘오류 가능성’의 공포를 자동차 업체들에 심어주고 있다. ‘급발진 추정 사고’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0월 미국 오클라호마 주에서 도요타 급발진 추정 사고 재판에서 사상 처음으로 배상 판결이 내려진 것은 이런 공포감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미국에서 도요타 관련 급발진 소송만 100건이 넘게 진행되고 있다. ISO 26262는 제조물 책임법(PL법)상 ‘최신 과학기술(State of the Art)’에 해당해 이러한 소송에서 제조사 측에 유리한 증거로 작용할 수 있다.

완성차 업체가 부품을 조립해 차량을 조립하는 구조에서, 이제 ISO 26262를 준수하지 못한 부품업체는 조립라인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BMW, 폴크스바겐 등의 업체는 우리나라 업체에 부품 발주를 할 때 ISO 26262 준수를 요구하고 있다. ISO 26262를 준수하지 못한 업체는 입찰 참여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현대차에 납품하는 국내 부품 업체들에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현대차의 ISO 26262 전면 도입 결정에 부품 업계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What에서 What+How로…부품 업계 관행에 일대 혁신

ISO 26262를 도입하면 부품 업체 일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지금까지 해온 작업 관행을 뿌리부터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What)과 어떻게(How)의 관계로 설명된다. 지금까지는 무엇(What), 즉 부품의 기능에만 충실하면 됐다. 어떤 부품을 사다가 조립하든,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든 상관 없이 완성차 업체가 원하는 기능만 만족시켜주면 됐다. 그러나 이제는 기능을 구현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간 과정까지 세세하게 챙기고 이를 일일이 기록해야 한다. 어떻게(How) 그 부품이 생산됐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라면 끓이기’에 비유한다. 기존 방식이 ‘감’에 의존해 라면을 끓이는 것이라면 ISO 26262는 ‘조리법’에 의존해 맛을 내는 것과 비슷하다. 감에 의존하면 때때로 원하는 맛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조리법을 따르면 항상 맛이 일정하다. 원하는 맛이 나오지 않았을 때도 감을 따르는 방식은 언제 어디서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지만, 조리법 방식에서는 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어 고치는 것도 쉽다.

ISO 26262가 도입되면 부품 업계 전반에 지각변동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ISO 26262의 특성상 연구개발을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중소 부품업체는 살아남기가 어렵다. 따라서 업체 간 인수합병이 활발해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머서매니지먼트와 프라운호퍼 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세계 자동차 부품 업체 수는 2000년 5600여개에서 2010년 3500여개, 2015년에는 2800개 수준으로 점차 줄어들 전망이다.

◇자동차 산업 선진화 계기…연관 산업 경쟁력 강화에도 큰 도움

ISO 26262는 초기에 ‘무역장벽’으로 인식됐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선진 자동차 업체들이 후발주자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국제표준’을 무기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 설명이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준비해온 업체와 이제 막 준비를 시작한 업체는 실력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해외 완성차 업체는 ISO 26262 준수 능력에 따라 입찰 기회를 제한하고 있다. 부품 업체의 수출 길이 막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ISO 26262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적극적 관점이 힘을 얻고 있다. ISO 26262 도입을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선진화 계기로 바라보려는 것이다. 도입 초반에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비용지출 때문에 어려움을 겪겠지만 이를 극복해내면 선진국 수준의 자동차 생산 기반 및 실력을 갖출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업계 전문가는 “100년 전에 이미 비행기와 전차를 만들던 나라들과 기계 부품을 경쟁할 수는 없지만 전자 부품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면서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자동차 산업에 성공적으로 ISO 26262를 이식하게 되면 부가가치가 큰 다른 산업으로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자동차를 비롯해 우주항공·비행기, 철도, 원자력, 의료기기, 오일·가스 등 고부가가치 산업에는 특화된 기능안전 국제표준이 적용되고 있다. 이 가운데 자동차가 가장 변수가 많은 복잡한 환경에 노출된다. 자동차 산업의 기능안전에서 앞서나가면 자연히 다른 산업에서도 앞선 기술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이는 향후 자율주행 자동차와 로봇산업 경쟁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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