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잡힌 방송산업발전계획
`산업은 없고 정치만 있다.`
정부가 발표를 앞둔 `방송산업발전 종합계획`이 산으로 가고 있다. 본연의 산업 발전에 대한 논의는 실종되고 방송사업자마다 자사 이기주의를 관철하기 위해 정치 논리 개발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5일로 예정돼 있던 종합계획 발표 일정이 전날 지상파 방송사들의 성명서 발표와 긴급 기자회견으로 돌연 연기된 것이 단적인 사례다.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달 14일 방송산업을 진흥시키겠다며 방송산업발전 종합계획 초안을 발표했다. 내용은 규제 완화가 골자다. 지상파 방송사에는 다채널서비스(MMS)와 광고제도 개선으로 중간광고 등을 허용하고 케이블TV, 위성방송 등 유료방송 사업자에게는 8레벨 측파 연구대(8VSB) 전송방식, 접시 안테나 없는 위성방송(DCS) 허용 등 기술 규제를 풀어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사안들은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지난 10여년간 각 방송사의 이해관계가 얽혀 첨예한 갈등을 빚어온 이슈다. `산업 발전` 논리보다는 지상파, 케이블TV, 통신사 등 각 업계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 싸움`으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해묵은 논쟁이 정부의 종합계획 발표를 앞두고 정점에 달하는 분위기다.
가장 반발이 큰 사업자는 지상파다. 한국방송협회는 종합계획 발표 하루 전인 4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의 계획안 발표에 반대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 방송사 정책본부장들은 그날 미래부를 항의 방문했다. 또 지상파 3사 모두 저녁 메인 뉴스에서 정부의 방송종합 발전계획을 비판했다. 정부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기에 지상파는 케이블TV의 8VSB와 위성방송의 DCS 도입 철회를 요구하고 있어 유료방송사업자들은 `집단 이기주의`가 심각하다고 반발하고 있다.
지상파의 요구사항은 다양하다. 유료방송이 중심이 된 계획에서 벗어나 초고선명(UHD) 방송용 700㎒ 주파수 배정, 지상파 중간광고 허용과 MMS 채널 허용 등을 주장한다.
이 중 지상파가 가장 원하는 것은 700㎒ 주파수다. 지상파 중간광고 허용과 MMS 채널은 이미 방통위에서 검토하고 있는 사안이다. 이경재 방통위원장은 올해 초부터 지상파 광고 제도 전반을 개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MMS 역시 EBS와 KBS 등 공영방송을 중심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지상파는 4K UHD와 3D 방송 등 다양한 차세대 방송을 하려면 700㎒ 주파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확보하지 못하면 방송의 존립 자체가 위협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동통신사들은 무선인터넷 트래픽 폭증에 대비하려면 700㎒ 주파수를 통신용으로 결정하는 것이 글로벌 흐름에 맞다는 입장이다. 이를 두고 통신업계와 주파수 용도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미래부와 방통위가 주파수 대역 활용 방안과 UHD 방송정책 등을 논의하기 위한 공동 연구반을 구성했지만 양측의 의견이 팽팽해 협의는 공회전 중이다.
`8VSB`도 700㎒ 못지않게 정치적인 이슈다. 8VSB 허용 여부는 이견이 분분하다. 위성방송과 IPTV사는 8VSB를 적극 반대한다. 케이블 업체를 위한 특혜라는 것이다.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와 KT,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KT스카이라이프는 방송산업발전 종합계획 발표를 앞두고 미래부에 반대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8VSB 전송방식 허용 검토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들은 케이블TV의 8VSB 전송방식 허용은 정부의 디지털 전환 정책에 역행하는 것으로 방송콘텐츠 불법사용 확대로 콘텐츠 시장 피해, 유료방송 시장의 저가화 고착, 채널수 감소로 아날로그 TV 시청자의 시청권 제한 등 많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는“8VSB 전송은 단방향 실시간방송만 가능해 양방향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한 디지털전환 정책에 역행한다”며 “쾀(QAM) 전송방식과 달리 콘텐츠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없어 콘텐츠의 불법 도·시청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500만 가구가 넘는 아날로그 케이블TV 가입자는 디지털 TV로 지상파 채널을 제외한 유료방송 채널을 표준화질(SD)로 보고 있다. 케이블 업계는 정부가 8VSB 방식을 허용해 주면 다른 유료방송 채널의 화질을 고선명(HD)으로 전송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500만이 넘는 가입자가 유료방송에 돈을 더 내고 IPTV나 위성방송으로 바꾸지 않아 `저가시장 고착화`를 불러올 가능성도 높다. 케이블은 8VSB로 가입자 이탈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고, IPTV와 위성은 가입자를 뺏어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위성방송과 IPTV는 다양한 이유를 앞세워 8VSB 허용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8VSB 허용 여부는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의 이해관계도 얽혀 있다. 500만 넘는 가구가 현재 종편 채널을 SD급으로 본다. 종편은 8VSB로 자사 채널을 HD로 보내면 지금보다 시청률이 오르고 광고를 더 많이 수주할 수 있다고 본다. 지상파는 종편이 HD로 바뀌면 한정된 광고시장 파이에서 지상파 몫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다. 지상파 중간광고 허용을 두고도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이 입장을 달리 하는 것은 한정된 광고시장 때문이다.
이처럼 방송산업은 사안 하나하나에 각 플랫폼·채널의 이해관계가 다르다. 업계 전문가는 “이기주의에 입각한 정치 싸움으로 변질돼 `방송`은 없고 `정치`만 있다”며 “방송이 자사 이기주의에 매몰돼 버렸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래부와 방통위, 문화부가 방송을 바라보는 이념과 철학이 다르다 보니 각 부처나 방송사의 이해관계에 치중하는 난맥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고조된다. 지난달 방송산업발전 종합계획 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 패널은 공통적으로 “정부가 일관된 철학과 비전이 없고, 이 계획으로 이루겠다는 전략, 목표 등이 체계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사업자간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정부가 정책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둘지 명확히 밝히고 방송산업에 제대로 된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방송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과 시청자의 편익이 극대화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출 것을 주문하고 있다.
송혜영기자 hybrid@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