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약과 파란약, 빨간약을 먹으면 진실을 볼 수 있지만 그 진실 속 세상은 비참했다.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그저 로봇이 쓸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건전지에 지나지 않는다. 로봇이 주입하는 꿈을 꾸면서 매트릭스 속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게 오히려 속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들은 날아오는 총알을 자유자재로 피하고 유려한 몸짓으로 화려한 액션을 펼치지만 이 모든 게 가능한 이유는 매트릭스 속 세상은 실체 없는 머릿속 생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꾸면 총알의 속도도 느리게 보일 수 있고 숟가락도 마음대로 구부릴 수 있다.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고 또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의 뇌를 조종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뇌에 프로그램을 주입하면 간단하게 통제 가능하다는 발상이 영화에 녹아있다.
근대 이후 인류는 스스로 `이성`을 갖고 자유의지를 실천한다고 믿어왔다. 의무와 책임도 거기서부터 비롯됐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려는 노력도 `이성`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근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보면 `이성적인 인간` `자유의지로 사는 인간`이라는 명제에 조금은 의심을 품게 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예가 사랑의 감정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 뇌에는 도파민 등 호르몬이 뒤섞인 신경성장요소(NGF)라 불리는 화학물질이 분비돼 감정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그 유효기간은 길어야 2년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이 물질을 어떤 사람 뇌에 주입하는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사랑의 큐피트`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최근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윤경식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박사후연구원 연구팀은 뇌에 간단한 전기 자극을 보내 즐거운 감각을 느끼는 `보상회로`를 조절하는데 성공했다. 과학이 점점 뇌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뇌에 새로운 능력을 주입하는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해 순식간에 각종 무술을 습득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어떤 기술을 습득할 때 상당한 시간동안 같은 행동을 반복해 뇌에 각인 시키는 방법을 이용해 왔다. 과학자들은 뇌 연구를 통해 그 과정을 단숨에 뛰어 넘을 수 있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
미 보스턴대와 일본 교토 ATR컴퓨터신경과학연구소 합동연구팀은 지난 2011년 사이언스지에 두뇌활동패턴을 바꾸는 신호로 시각 피질을 자극해 시각 능력을 향상시켰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이 기술을 응용하면 무술, 비행기 조종, 외국어 능력을 몇 번의 전기 자극만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통제한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뇌는 단순한 전기 자극만 있어도 쉽게 무장해제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전기신호 패치를 머리에 붙이지 않고 있는 지금 우리의 뇌는 믿을만한가?
르네 데카르트는 교활한 악령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이른바 `악령의 가설`을 내놨다. 페터 웅거는 지난 1975년 이 가설을 더욱 발전 시켜 저자 `무지`에서 우리 주변에 의자, 책, 그와 비슷한 사물들이 있다는 공통적인 믿음은 한 사악한 과학자가 우리 뇌를 자극해 만들어 낸 정교한 각본일 뿐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그는 “전자극으로 사람들을 속여 바위가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사악한 과학자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페터 웅거가 연구실 속 용기에 담겨있는 뇌를 상상했다면 매트릭스는 아예 인간 자체를 용기에 담아 시각화했다.
두 회의론자의 얘기를 빌지 않더라도 뇌가 인식하는 세상과 뇌를 통해 느끼는 감정, 뇌가 내린 결정이 그렇게 믿을만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인간들은 고민과 후회, 반성을 반복하면서 사는 것일지도.
오은지기자 onz@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