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한국 슈퍼컴 후진국으로 전락했다…투자 확대와 기반 조성이 급선무

한국 슈퍼컴 후진국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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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슈퍼컴퓨터가 끝없이 추락한다. 최근 발표된 세계 500위 순위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인 기상청 해온과 해담은 각각 91위, 92위를 차지했다. 77, 78위였던 지난해 말보다 14계단 내려갔다.

2009년 14위(KISTI 타키온2)였던 한국 슈퍼컴은 2011년 20위권, 2012년 70위권으로 떨어진 데 이어 이제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기 일보직전이다. 투자가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당연한 결과다. 문제는 순위가 아니라 슈퍼컴 저변이 미국과 중국에 비해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관련 예산도 제자리걸음 수준이어서 더 적극적 투자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

◇한국 슈퍼컴, 90위 밖으로 밀려나

지난 17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국제 슈퍼컴퓨팅 콘퍼런스(ISC) 2013`에서 중국 톈허2가 33.9페타플롭스 성능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에 등극했다. 1페타플롭스는 1초에 1000조번 연산 가능 횟수를 의미한다. 톈허2는 1초에 3경3900조번 연산이 가능하다. 70억 인구가 5년 1개월 동안 계산할 양을 1초 만에 처리하는 성능이다.

우리나라 슈퍼컴은 500위 안에 네 대가 등재됐다. 수량은 변동 없지만 순위는 크게 떨어졌다. 해온과 해담에 이어 KISTI 타키온2가 107위, 서울대 천둥이 422위다. 타키온은 7개월 전보다 18계단, 천둥은 144계단 하락했다.

슈퍼컴퓨터는 일반 컴퓨터와 차원이 다른 계산 능력을 갖춘 컴퓨터다. 과학 분야뿐 아니라 제조, 국방, 우주항공, 기상, 의료, 화학·에너지, 신소재, 재난예방을 비롯해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공학 계산과 시뮬레이션에 쓰인다. 전 산업에 걸쳐 슈퍼컴 활용 수요가 꾸준히 증가한다.

슈퍼컴은 한 나라 과학기술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다. 어느 나라 슈퍼컴이 세계 1위인지, 세계 순위 500위 안에 등재된 슈퍼컴을 몇 대 보유했는지는 단순한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슈퍼컴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일본이 지속적으로 산업을 육성하고 투자를 늘리는 이유다.

`어차피 돈 싸움인데 투자만 늘리면 언제든 다시 순위가 올라가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싼 장비를 들여 잠시 순위를 높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산업 전반에 걸쳐 슈퍼컴 활용을 확대하고 원천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세계 상위 500위 내 슈퍼컴 중 미국이 253대, 중국 65대를 보유했지만 우리나라는 단 4대에 불과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체적 지원책 마련 시급하다

우리나라에도 슈퍼컴 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고성능 컴퓨팅 전문업체가 80여곳에 이르던 때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이 업체들은 현재 열에 아홉이 문을 닫았다. 슈퍼컴 시장이 확대되려면 물리와 조선, 화학 등 관련 산업이 활성화돼야 하지만 관심 부족과 소극적 투자로 시장은 침체됐다.

기술제공 업체와 기업, 정부 어디에서도 인력 양성은 이뤄지지 않았다. 수요 기업에서 운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도입 효율성이 낮아졌고 투자는 감소했다. 결국 신규 수요 창출 저하라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고성능 컴퓨팅 전문업체가 슈퍼컴 원천 기술 확보를 위한 기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안타까운 대목이다.

뒤늦게 슈퍼컴 산업 육성의 중요성을 깨달은 정부는 2011년 슈퍼컴 육성법을 발효하고 지난해 말 국가 슈퍼컴퓨팅 육성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세계 톱10 수준의 슈퍼컴을 개발하고 신규 수요 창출을 위해 활용을 확대하는 게 핵심이다.

사업이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아쉬운 점은 청사진인 기본계획 수립까지는 적절히 진행됐지만 구체적 사업 계획과 시행계획 수립이 늦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예산을 편성하기가 어려워 최근 정부가 발표한 시행계획은 국가 슈퍼컴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등 제한적인 내용을 담았다. 기본계획이 지난해 말에 나왔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계획 수립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미래부 측은 “현실적으로 올해는 예산이 반영되는 계획을 수립하기가 어렵고 추진할 수 있는 사업도 제한적”이라며 “내년부터는 기본계획에 따라 구체적인 신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슈퍼컴 육성법에 따라 국내 슈퍼컴 산업이 활성화되려면 앞으로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다. 정부의 더욱 적극적인 투자 의지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국내 슈퍼컴 예산은 한 해 1000억원 정도로 파악된다. 수년간 큰 변동이 없다. 유지보수비와 임대료 등이 포함된 금액으로 실제 시스템 도입과 연구개발(R&D)에는 절반 가량이 쓰인다. 개발비 1000억엔(약 1조1000억원)을 투자해 엑사급 슈퍼컴 개발에 착수하는 일본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슈퍼컴 강국을 위한 선결과제는 저변확대

전문가들은 국내 슈퍼컴의 저변 확대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소규모라도 고성능 컴퓨팅 수요를 발굴해 사용 빈도를 높여야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최초 슈퍼컴퓨팅 전문 업체인 클루닉스 권대석 대표는 이를 노벨상 수상에 비유했다. 권 대표는 “국가가 소수의 뛰어난 과학자를 집중, 양성한다고 해서 당장에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하는 건 아니지 않냐”며 “풀뿌리 연구가 중요한 것처럼 고성능 컴퓨터에 대한 수요부터 파악한 뒤 산업을 육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흔히 슈퍼컴퓨터하면 `돈 먹는 하마`로 인식한다. 고가의 장비가 준 영향이다. 하지만 이런 선입견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이다.

권 대표는 “중요한 것은 누가 얼마나 비싼 장비를 쓰느냐가 아닌 고성능 컴퓨터를 얼마나 폭넓게 쓰고 있는지”라며 “활용 현황을 파악하고 적용 가능한 새로운 분야를 발굴하는 게 먼저”라고 강조했다.

오재호 한국슈퍼컴퓨팅협의회장도 기반 마련을 강조했다. 오 회장은 “얼마나 많은 연구계와 산업계가 슈퍼컴을 쓰는 지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하더라도 선수가 많으면 다시 도전하면 되는 것처럼 슈퍼컴퓨터도 저변이 넓어야 발전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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