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러시아 유학시절. 일본과 독일 차들이 점령한 도로에서 만난 `현대·기아차`는 더 이상 특정 기업이 만든 차가 아니라 `한국차`였다. 트롤리버스를 타고 달릴 때면 창밖을 보며 오늘은 몇 대의 한국차를 보았나 하고 셈을 할 때도 있었다. 당시 어쩌다 보이는 한국차만으로 마음은 짠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 사이 현대·기아차는 러시아뿐 아니라 브라질과 중국 등 세계 각지에 자동차공장을 지었다. 작년 한 해 글로벌 판매량이 700만대를 넘었다. 세계 5위권에 진입해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불과 몇 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한 기업의 경쟁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연구개발(R&D) 비용이 경쟁사에 한참 못 미치는 상황에서 달성한 성과다. 2011년 기준 현대·기아차 R&D 투자액은 도요타의 5분의 1 수준에 그쳤다. GM이나 폴크스바겐은 물론이고 글로벌 판매순위가 뒤지는 혼다나 다임러보다도 적다. 많은 이들이 이를 비판한다. 이렇게 넉넉하지 못한 R&D 살림으로 이만한 성과를 낸 것이 대단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제 예전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실을 다지지 않으면 한 단계 성장하기 어렵다. `도요타 사태`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잘되면 시기와 질투가 반드시 따른다. R&D 투자가 필요한 이유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신년사에서 `내실경영`을 강조한 것은 이 같은 맥락이다. 정 회장은 차세대 자동차에 대한 R&D 투자도 대폭 확대하겠다고 했다. 연말 인사에선 R&D 조직에 힘을 실어줬다.
웃자란 벼는 태풍에 쉽게 쓰러진다. `잘나가는 게 걱정`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빨리 자란 만큼 성장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럴 때일수록 실속을 다지는 지혜가 필요하다. 조직을 재정비하고 내실을 기하다 보면 성장 속도가 예전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단기 실적 부진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나올지 모른다. 이런 비판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본다. 꾸준하고 알찬 경영에 현대·기아차의 미래가 달렸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