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르게 성장하던 우리나라 경제기조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수년 전부터 좀체 성장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1인당 소득 4만달러를 꿈꾸던 우리가 2만달러대에서 딱 멈췄다. 일부에서는 일본과 같은 장기불황 늪에 빠지면서 `2만달러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불을 다시 지필 수 있는 다양한 대안이 나오지만 뾰족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2만달러에 만족하며 “아! 옛날이여”를 가슴 아프게 읊조려야 할까.
◇흔들리는 과학·기술입국 50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 법이다. 현상이 아닌 본질을 찾아야 문제 해결이 쉬워진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으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시계추를 6·25전쟁 전후 복구 시기를 막 벗어난, 지금부터 대략 50년 전으로 돌려 보자.
산업화 문턱에 들어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채 100달러를 넘지 못했다. 유엔(UN)에서 정한 `빈곤(Poverty)` 기준이 하루 1달러임을 감안하면 극빈국 중에서도 초극빈국이었다.
그때 경제성장을 위해 내건 슬로건이 바로 `과학입국, 기술입국`이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과학시대를 예견하고 과학기술 인프라 구축에 두 팔을 걷어 붙였다.
선진국에서 활약하는 과학두뇌를 모아 KIST를 만들고 KAIST와 전국에 기술학교를 세우는 등 과학기술 인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2000년대까지 최고 인력은 이공계로 몰렸다. 지난 시절 우리가 이룬 눈부신 경제성장은 따지고 보면 과학기술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과 투자 덕분이었다. 미래 국가경쟁력은 앞선 기술에 달려 있다는 신념으로 우수 인재 양성에 온 힘을 기울인 결과였다. 이들 이공계 인력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2만달러 대한민국`을 이룬 주역이다.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어보자. 올해 국감현장. 김태원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의원(새누리당)은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울대를 자퇴한 학생 342명 중 234명(68.4%)이 이공계열이라고 공개했다. 서울대 자퇴생 중 이공계열 비중은 2009년 61.8%에서 2010년 47.9%로 주춤하다 지난해 86%로 다시 크게 올랐다.
이상민 의원(민주통합당)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총 자퇴생 중 이공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64.3%에서 올해 67.8%로 갈수록 늘고 있다. 김태원 의원은 “졸업해도 취직이 어렵고 일자리를 얻는다 해도 임금보장이 안 되는데다 직업 안정성도 없다는 것이 자퇴 이유”라고 설명했다.
◇추락하는 이공계 위상, 멈춘 경제성장
일부 사례지만 불과 10년 전과 비교해도 확실히 달라졌다. 이공계 인력이 갈 길을 못 찾으면서 인재 불균형이 심각해지고 있다. 우수 인재가 공대 대신 의대나 약대로 몰리고, 공대생이 고시원을 찾을 정도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이공계 기피 현상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가 결정타였다. 당시 경기침체가 극심해지면서 산업계에서 살인적 구조조정이 일반화했고 1차 감원 대상이 엔지니어였다. 오직 회사를 위해 기술 개발에만 몰두했는데 돌아온 것은 칼바람이었다. 엔지니어 홀대라는 자괴감이 산업계에 팽배했다. 이를 막지 못한 정부의 안이한 정책은 사태를 더욱 부채질했다.
10년 넘게 이공계가 찬밥으로 전락하면서 경제 기초 체력인 원천 기술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올해 초에는 서울대 수시에서 컴퓨터공학과에 합격한 최연소 영재가 결국 연세대 치대로 진로를 바꿔 충격을 줬다.
교과부 자료에 따르면 과학영재고 학생이 대학생, 대학원생, 이공계 엔지니어로 성장할수록 더욱 심각하게 소외감을 느끼는 게 가슴 아픈 현실이다. 박홍근 의원(민주통합당)은 `이공계 인력 유출입 현황` 자료에서 지난해 학위를 위해 해외로 나간 이공계 대학생은 1만2240명에 달했다고 보고했다. 2008년 1만1091명에 비해 10%가량 늘어난 수치다. 좋은 연구 환경과 일자리를 찾아 우수 인재가 해외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공계 인력이 떠나면서 기술 경쟁력에도 구멍이 생겼다. 2010년 기술사용료로 102억3400만달러를 외국에 지불했다. 기술 수출액은 33억5000만달러에 불과했다. 미국·일본·독일과 같은 선진국은 기술로 돈을 벌 때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국부가 솔솔 새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처럼 미래 꿈나무인 10대 청소년이 가슴에 품었던 과학 열정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성장을 위한 기초체력이 과학기술이고, 과학기술 핵심이 이공계 인력인데 인력 선순환 면에서 헛바퀴가 돌고 있는 것이다.
◇소득 4만달러, 지름길은 이공계 르네상스
짧은 기간에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춘 것은 정부의 전폭적 기술 지원 때문이었다. 기술 경쟁력은 결국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게 골자다. 그것도 양과 질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 뛰어난 인재 한두 명이 이공계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로는 과학대국 명성을 회복하기에 부족하다.
다행히 이공계를 키워야 한다는 사회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삼성·LG와 같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이공계 출신이 성공한 모델도 보여줬다. 병역 특례와 같은 다양한 혜택으로 우수 인재가 이공계로 가는 물꼬를 열었다. 다양한 인센티브 정책은 부분적으로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핵심이 빠졌다. 바로 이공계 출신이 가졌던 자긍심을 찾아줘야 한다. 대학을 졸업한 이공계 인재가 20~30년 후 비전이자 희망임을 일깨워 줘야 한다.
해법은 하나다. 사회가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가치를 인정해 주는 길뿐이다. 중국 국가지도층 대부분이 칭화대 등 이공계 출신이란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회의원 이공계 출신 모임을 운영하는 서상기 의원(새누리당)은 “한시적으로 주어지는 인센티브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공계 전공자가 긍지를 느끼고 과학기술자의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그러나 국가 미래와 일자리를 이야기하는 데 빼 놓을 수 없는 게 연구개발이다. 토종 원천 연구개발 경쟁력을 앞세워 세계를 활보하고 산업과 경제를 주도할 때 우리도 희망이 있다. 이를 위한 알파와 오메가가 바로 이공계 우수 인력이다. 이공계가 주도하는 새로운 과학기술 르네상스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