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글 관련 학회 90여곳이 한국어문학술단체연합회 결성을 선언했다. 그동안 반목이 심해 개별 활동에 치중했던 어문학·교육단체들이 한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다. 대정부 언어정책 건의, 북한과의 어문 교류, 한국 어문학 세계화 등이 주목표다. 하긴 남북이 함께 쓰는 언어가 상호 문자명도 다르고 기념일도 다른데 할 일이 오죽 많으랴.
조선왕조 세종 때로 되돌아가 보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대주의자의 소신이었을까. 중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봤다. 대국을 섬기는 데 문제가 있다고 했고, 고유문자를 가진 민족은 모두 오랑캐라고 주장했다. 소나 돼지와 같은 백성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설파했다. 중화사상으로 무장한 기득권적 지배계층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월이 흘렀다. 세계 10위 교역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정보통신기술(ICT) 코리아의 위상도 세웠다. 한글의 우수성이 부각됐다. 가장 과학적 문자로 조명 받는다. 알파벳을 제외한 언어 중 컴퓨터 자판에서 자국어 문자를 구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언어다.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글이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왜 만드느냐고 했던 최만리도 인정한 신묘하고 뛰어난 문자다.
문자의 경제성을 얘기하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모바일 시대 얘기다. 문자 경쟁력은 곧 경제 가치로 이어진다. 중국어와 일본어가 대표적이다. 한자를 표기하려면 알파벳으로 먼저 입력하고 자동변환방식을 이용해 다시 이를 한자로 변환해야 한다. 일본어는 이 때문에 한글보다 28배 이상 비용이 추가돼야 한다. 한글이 투입 대비 생산성이 뛰어나다는 의미다.
한글은 표음문자다. 자음과 모음을 자유자재로 결합해 낱말과 문장을 형성하는 방식은 알파벳보다도 직관적이고 효율적이다. 영어는 같은 표음문자인데도 알파벳 26자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가 300여가지에 불과하지만 한글은 자모 24자로 이론상 1만1000가지, 실제로는 8700여가지의 소리를 낼 수 있다. 하늘(天)·땅(地)·사람(人)을 의미하는 세 개의 기본 모음에 나머지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스마트폰 자판의 수를 줄일 수 있어 효과적이다. 한글은 모바일 시대에 더 빛난다.
이번에는 미국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가 돼버린 영어의 위상 앞에 한글은 다시 `오랑캐 언어`가 된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조기 유학과 어학연수가 필수 코스가 돼버린 사회현상 속에서 영어 공용화 주장 또한 위력을 발휘한다. 미국 유학파들이 정·관·산·학계를 지배한 지금 `미국을 섬기는 데 부끄럽지 아니한가` 하는 목소리가 나올 법하다. 언젠가는 뼛속까지 친미를 외치는 `최만리들`이 영어 공용화를 넘어 `오랑캐 언어`인 한글을 폐기하자고 주장하지 않을까.
한글이 신음한다. 아직도 사시미, 우동 같은 왜색 말과 멘붕, 쌤 같은 국적 없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패밀리마트, 베스킨라빈스, 버거킹 등 거리를 점령한 입간판도 혼란스럽다. 웹진, 로밍, 로그아웃, 소셜미디어 등도 일상화된 말이다. 언어의 사대현상일까, 유행일까. 조선시대에는 중국어에 치이고, 일본 강점기엔 일본어에 말살당하고, 오늘날엔 영어 때문에 뒷전으로 밀렸다.
어문청을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우리말의 최신 표기법이나 아름다운 글, 표현 등을 시대적 요청에 따라 다듬을 국어 정책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기술·군사·문화 등 전문용어는 물론이고 생활용어까지 영어로 대체되는 세상이다. 혼(魂)이 담긴 말은 경제적 가치 이상이다. 학술단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할 국가 조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말을 정책적으로 관리하고 육성하기 위해 어문청 신설이 반드시 필요하다.
박승정 정보사회총괄 부국장 sj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