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손안에서도 주식거래가 완벽하게 가능하다. 스마트폰 하나로 통화는 물론이고 주식거래까지 가능해져 언제 어디서나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15년 전만 해도 상황은 전혀 달랐다. 전화선을 통한 PC통신이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전화선 모뎀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종합정보통신망(ISDN)과 비대칭가입자회선(ADSL) 등 네트워크가 점차 가정에 보급되면서 온라인 거래 수요가 급증했다. 증권업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증권거래법 온라인 거래를 담다=변화의 단초는 1997년 4월 1일 발효된 새로운 증권거래법 개정안이다. 골자는 증권사 전자통신방법 수탁 허용과 증권업 허가 기준 완화 등이다. 이른바 홈트레이딩시스템(HTS:Home Trading System)과 온라인 증권사 출범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전자통신방법 수탁 허용은 증권업계에 온라인 증권 거래 붐을 조성했다. 법 개정에 따라 팩시밀리, 인터넷 컴퓨터 단말기 등을 통한 주식매매주문이 가능해지면서 홈트레이딩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그간 천리안, 하이텔, 유니텔 등 상업용 PC통신망을 비롯해 증권사 망을 통해 인터넷 주식거래가 있었지만 주식거래는 개정 전 시간에 예약주문만 허용됐다.
증권거래법 개정과 함께 대우증권과 동서증권, 동원증권 등 각 증권사는 PC통신 기반 기존 트레이딩시스템에 실시간 거래를 일제히 접목했다. 주식시장 실시간 거래가 가능해진 것이다.
가장 먼저 홈트레이딩시스템이라고 명명한 곳은 조흥증권(현 솔로몬투자증권)이다. 조흥증권은 1997년 12월 홈트레이딩 시스템 개통식을 가졌다. 당시 조흥증권 인터넷 HTS로 명명된 이 시스템은 주식매매 주문과 정보조회 거래내용 잔고조회 등이 가능했다.
인터넷 주식거래는 수수료가 저렴하다는 것과 증권사 직원 도움 없이 투자자가 직접 주식을 사고팔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PC 보유자가 늘고 초고속인터넷 보급이 확산된데다 은행권과의 제휴로 인터넷뱅킹, 공모주 청약 등 다양한 온라인 금융 서비스가 도입되면서 그 이용자 수와 투자금액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97년 267만명에 그쳤던 주식투자인구는 1999년 418만명으로 확대됐다. 2009년 주식투자인구가 466만명인 것을 고려하면 당시 2년간 주식투자 인구가 얼마나 급격히 증가했는지를 보여준다. 1997년 5560억원이던 일평균 거래대금도 2000년 5조원으로 10배가량 늘었다. 가히 증권업계에 혁명을 몰고 온 것이다.
인터넷 주식거래 활성화와 함께 증권업 허가 기준 완화로 온라인 증권사들도 대거 탄생했다. 일괄적으로 500억원이던 자본금을 차등화한 법도 발효됐다. 이에 따라 위탁매매업은 100억원, 위탁매매와 자기매매 겸업 때는 300억원, 종합증권업은 300억원 이상으로 축소했다.
1999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500억원 자본금으로 미래에셋증권의 전신인 E*미래에셋이라는 사이버증권사를 문을 연 것을 비롯해 2000년 이트레이드증권, 키움증권, 겟모어증권 등이 온라인 전용 증권사로 잇따라 출범했다. 온라인 증권사의 탄생은 수수료 체계에도 변화를 몰고 왔다. 지점개설로 인한 비용을 최소화하고 수수료를 대폭 낮춰 투자자들이 저렴한 수수료로 증권거래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IT와 함께 성장해온 증권시장=HTS의 탄생은 법 정비와 함께 증권사 전산전문가들의 시스템 개발 노력이 함께했기에 가능했다. 1989년 8월, 대우증권의 다이얼 밴(DIAL VAN) 서비스 출시는 HTS의 효시라 불릴 만하다. 1980년대 말 PC통신이 본격화되면서 객장을 찾지 않고 컴퓨터 단말기에 연결된 주식시세 정보를 토대로 가정에서 전화나 컴퓨터를 이용해 주식매매 주문을 내는 이른바 `안방 주식투자`시대가 본격 도래하게 된다. 초기에는 주식시세 보기와 매매주문 기능 정도밖에 없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 각종 분석은 물론이고 매매상담까지 할 수 있게 됐다.
통신 신기술이 속속 등장하면서 증권거래에 이를 접목하는 사례도 부쩍 증가했다.
1998년 12월, 대우증권이 포켓용 무선주문 단말서비스를 개시한 것을 비롯해 고객 문의 응대를 위해 전화정보통합관리시스템을 도입했다. 또 2001년 9·11 미국 테러사건 이후 재해복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증권사는 백업센터 가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후 HTS는 변화를 거듭하면서 미국, 일본, 홍콩 등지의 증권시장 직접투자가 가능해졌고 투자정보 역시 증권사 리포트는 물론이고 다양한 정보를 담게 된다. 증권사마다 버전도 초보자부터 고급 이용자까지 다양한 수준의 HTS를 내놓고 있다. 개인투자자 이용이 주류를 형성하면서 HTS는 금액기준으로 2009년 주문 매체별 현황에서 전체 70%가량이 이뤄질 만큼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후 증권거래 스마트앱을 통한 거래가 늘면서 비중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HTS와 스마트앱을 동시에 사용하는 투자자가 늘어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단위 : 천명, %)
(자료:한국거래소, 금융투자협회)
◆ 유용환 KTB투자증권 전무
“어떤 미친 사람들이 PC통신으로 주문을 내겠냐. 지점에 전화 한 통만 하면 되는데 귀찮게 PC를 켜고 해당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고 전화망과 연결해 시스템에 접속시켜 사용자번호와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화면을 불러내 일일이 조회하고…. 내가 한 달 동안 10억원어치만 거래돼도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
유용환 KTB투자증권 전무는 1997년 온라인 거래가 시작될 무렵 이 같은 회의적인 시각이 팽배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회의론자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온라인 실시간 거래 개시 후 불과 며칠 만에 한 달 약정이 아닌 하루 약정이 10억원을 넘겼다. 실시간 매매주문이 허용된 지 2년여가 지난 1999년 말에는 사용자 수가 25만명에 달했다. 약정 규모도 하루 3000억원을 넘어섰다.
유 전무는 당시 개발자로서 온라인 증권거래가 주류로 등장할 것임을 확신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유 전무가 1986년 대우증권에 입사할 때만 해도 증권사에 대부분 주문 단말기는 한 대에 불과했다. 지점마다 고객들의 시세와 체결 주문이 들어오면 일일이 수작업으로 전산입력하던 시절이었다. 주문이 몰리는 날이면 장 개시 전에 이미 하루 주문이 마감되는 때가 많았다. 증권사 객장에 있는 손님도 돌려보낼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HTS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다이얼 밴을 만들기 시작한 1988년은 증권시장이 바닥을 벗어나 1000포인트를 향해 숨가쁘게 상승하던 시기였다. 지점마다 고객의 시세와 체결 문의 전화 주문이 폭주했다. 전화는 불통이고 지점에 비치된 시세조회 단말기 부족으로 고객 간 쟁탈전이 벌어졌다. 전화와 시세조회 단말기를 대체할 수단이 필요했다.
유 전무는 입사 2년 만인 1988년 당시로서는 거액인 10억원이 투자되는 홈트레이딩시스템 개발을 책임졌다. MS-DOS 환경의 16비트 PC도 고가로 보급률이 낮았고 PC통신조차 동호인들이 전자게시판(BBS)을 개설해 작은 규모로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통신 속도 역시 1200~2400bps(초당 영문자 120~240자 전송속도)에 불과했다. 집 안에서도 100Mbps를 누릴 수 있는 현재와는 사뭇 다른 환경이었다. 복잡한 증권분석 그래프를 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비스 개발에 몰두한 덕분에 원터치로 문자정보와 그래프 표현까지 매끄럽고 속도감 있게 표현한 다이얼 밴이 완성됐다. 개발자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노력한 결과가 빛을 발한 것이다. 이후 다이얼 밴은 1989년 8월 서비스가 완성됐다.
유 전무의 개발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95년 11월에는 전화로 주식정보를 알려주는 음성인식 증권정보서비스를 개발했고 1998년 10월에는 자동응답 증권매매서비스를 개발했다. 1998년 12월에는 세계 최초로 포켓용 무선주문단말기를 개발했다.
이러한 공로를 평가받아 1999년에는 금융감독위원회가 선정한 금융신지식인에 이름을 올렸다. 2011년 KTB투자증권으로 옮겨가고서도 유 전무의 개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최근에는 부서원들과 함께 스마트앱과 새로운 증권거래 툴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유 전무는 “HTS가 탄생한 배경은 고객의 요구와 개발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일궈낸 결과”라며 “증권 거래 매체는 정보기술(IT) 발달과 함께 고객 요구에 발맞춰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