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전 국민의 관심은 한일 월드컵에 쏠렸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 국가대표팀이 4강 신화를 만들어 갈 때, 한반도는 `대∼한민국` 열기에 휩싸였다. 벤처 붐을 타고 온라인게임 산업도 활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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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게임산업계에 가공할 만한 대형 태풍이 등장했다. 다름 아닌 `온라인게임 사전등급제`였다. 게임마다 일반인에게 서비스되기 전에 연령별 등급을 매기는 게 골자였다. 등급제는 도입을 두고 1년가량 논란이 진행됐다. 산업육성 논리에 가려 있던 게임과 관련한 사회윤리 문제도 쟁점으로 떠올랐다. 반면에 `등급제`라는 다소 낡은 방식의 잣대가 개발자들의 창작의욕을 꺾어놓을 것이라는 부작용도 제기됐다.
결국 영상물등급위원회는 2002년 10월 온라인게임 사전등급분류제 전면 실시에 들어갔다. 이는 게임업계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특히 온라인게임 대표주자인 `리니지`가 18세 이용가 성인등급을 받으면서 이를 둘러싼 찬반논란도 뜨거웠다. 결국 재심의를 거쳐 `리니지`가 청소년 이용가 등급을 받으면서 등급제 파동은 봉합됐다.
◇도입 과정=온라인게임 심의 문제는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였다. 정부는 2000년대 초 온라인게임의 중독성이 사회문제로 불거지자 등급제 도입을 추진했다. 온라인게임 사용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온라인게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적 역기능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온라인게임 속 아이템을 현금으로 거래하면서 사기나 폭행, 성매매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역기능을 계속 방치하게 되면 사회 문제는 물론이고 게임산업의 부정적 이미지만 확대 재생산돼 궁극적으로 산업이 공멸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는 분위기였다.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에서 흔히 사용되는 PK(Player Killing)도 쟁점이었다. 업계와 정부는 플레이어를 죽이는 행위(PK)에 상반된 방침을 견지했다. 플레이어가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과 별도로 다른 플레이어의 분신인 아바타를 죽이는 행위를 통상적으로 PK라고 불렀다.
이는 온라인게임의 고유 특성인 플레이어 간 상호작용성(interativty)을 극대화하기 위해 게임업체들이 개발한 장치였다.
특히 당시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온라인게임 사전등급제를 시행하기로 하고 PK가 허용되는 게임에 18세 이용가 등급을 부여하는 등 강력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게임개발사들은 PK라는 용어에 살인(killing)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더욱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치고 있다며, 해외에서는 PK가 아니라 PVP(Player VS Player Combat)라는 용어가 일반화된 점을 들어 PK도 게임의 일부라고 반박했다.
◇주요 내용=2002년 10월 시행된 온라인게임 사전등급제는 게임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는 패치 범위를 축소했다. 또 다른 게이머의 캐릭터를 죽이는 PK 행위가 폭력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평가될 때만 PK를 등급분류 검토대상으로 고려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패치는 패치실시 전 등급분류를 받기로 한 기존방침을 변경, 게임의 맵이나 에피소드, 서버를 추가하는 등 당초 등급분류를 받은 내용에 비해 상당부분이 변경될 때만 패치실시 이후 7일 이내에 신고하도록 했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신고된 패치 내용에 과도하게 선정성, 폭력성, 사행성이 포함됐다고 판단될 때에만 정식 등급분류를 했다. PK는 게이머의 선택권을 존중해 게이머가 PK에 동의를 할 때 허가하고 선택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과도한 적개심이나 증오심을 불러일으킨다면 청소년 이용을 제한했다.
등급분류 대상은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느슨하게 적용해 왔던 사전등급분류를 받지 않은 온라인게임이었다. 이들 게임은 모두 유예기간 3개월 이내인 9월 30일까지 등급분류를 받아야 한다.
◇반응과 여파=2002년 4월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이 제도 도입방침을 내놓자 게임업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동안 심의 무풍지대에서 아무런 제재 없이 사업을 펼쳐온 업계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업체들은 온라인게임 등급분류 시행에 정면으로 반발했다. 온라인게임 이용자 대부분이 10대인 상황에서 청소년 이용불가 게임으로 판정나게 되면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PC방 등 게임 관련업계 역시 등급제가 가져올 영향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였다.
문화부와 정보통신부는 미묘한 갈등을 겪었다. 두 부처 모두에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문화부와 정통부는 이 제도 도입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정보통신부는 지나친 규제는 산업발전을 저해할 뿐 아니라 기술경쟁력 저하를 불러올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정통부 산하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온라인게임을 사후 심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화부의 사전등급 심의와 중복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게임 심의는 이원화 시스템이었다. 영등위는 사전심의,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이하 정통윤)는 사후심의 체제로 움직였다.
◇영향=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은 `리니지`가 18세 이용가 등급을 받아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확산되자 `홍수환론`과 `휴대폰론`이라는 특유의 비유법으로 게임의 긍정적인 측면을 옹호했다. 그는 또 영상물등급위원회와 팽팽한 대립에서 한 걸음 물러서 `리니지`를 수정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김 사장은 이 같은 조치로 `등급제 논란`을 일단락지었다.
등급제라는 악재는 게임업체 주가에 그대로 반영됐다. 2002년 5월 23일 리니지로 유명한 엔씨소프트의 주가는 11.88% 하락한 17만9000원을 기록하며 하한가를 맞았다.
2002년 4월 18일 25만6500원까지 치솟았던 엔씨소프트의 주가는 한 달 만에 17만9000원까지 떨어졌다. `사전등급제에 따라 심의를 거쳐 `18세 이용가` 판정이 나면 엔씨소프트 매출에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반영된 결과였다. 액토즈소프트도 11.74% 떨어진 1만4650원으로 주저앉았다. 온라인게임업체뿐 아니라 당시 온라인게임을 출시할 PC네트워크게임 및 유통업체인 위자드소프트와 한빛소프트의 주가도 나란히 가격제한폭까지 추락했다.
등급제가 시행되면서 엔씨소프트의 리니지는 18세 이용가 판정을 받기도 했다. `리니지`는 2002년 10월 17일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18세 이용가 판정을 받았지만, 결국 한 달이 채 안 된 11월 14일 게임을 두 가지 버전으로 수정한 끝에 12세와 15세 이용가 등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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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갑수 문화관광부 게임산업과장(현 문화체육관광부 콘텐츠정책관)
“2012년 하반기 시행되는 온라인게임 민간자율 심의도 10년 전 사전등급제가 토대가 됐다고 봅니다.” 김갑수 문화체육관광부 콘텐츠정책관(국장)은 10년 전 기억을 되살리면서 결과적으로 옳은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김 국장은 당시 문화부에서 게임 산업을 책임지는 주무과장이었다.
그때는 반발이 많았지만, 지난 10년간의 운영 경험이 있었기에 아이템거래 기준이 마련됐고, 폭력성·음란성·사행성을 판단하는 한국식 판단 잣대가 수립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국장은 “당시에도 산업논리와 청소년 보호라는 두 가지 가치를 놓고 의견이 충돌했지만, 결과적으로 온라인게임 산업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온라인게임 등급 심사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 하는 기술적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었다”면서 “10년간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민간 자율심의가 한 단계 진전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온라인게임 심의는 규제라는 지적이 많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산업발전을 위한 안전장치가 됐다고 김 국장은 말했다.
김 국장은 “당시에도 폭력성과 중독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었다”면서 “그때 온라인게임에 관한 사회적 역기능에 대한 비판을 방치했다면 게임산업 전체가 힘들어졌을 수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2002년만 해도 PC게임과 패키지 게임 등급분류 제도는 시행됐지만, 새로운 게임으로 부상했던 온라인게임은 별도 규제 장치가 없던 상황이었다.
그는 “아이템 거래를 비롯해 아바타를 죽이는 PK 등이 큰 문제가 됐었다”면서 “이 같은 혼선을 없애기 위한 기준마련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PK는 비록 실제로 신체적 상해나 위해가 가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상현실에서 타인을 죽이는 살인행위라는 점에서 그동안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갑수 국장은 마지막으로 “온라인게임 사전등급제는 지금 생각해도 청소년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제도였다”고 힘줘 말했다.
김원석기자 stone20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