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12월, 국내 일간지에 특이한 전면 광고가 게재됐다. `한민족 세계 제패, 월드베스트정신으로 해냈습니다`는 카피를 담은 광고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특히 광고에는 구한말 당시의 태극기가 큼지막하게 상단에 자리잡고 있었다. 삼성전자가 256M D램 개발에 성공한 그해 8월 29일은 바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일`이었다. 김광호 당시 삼성전자 사장은 “적어도 D램 기술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평등했던 구한말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삼성전자의 256M D램 개발은 우리나라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지 11년 만에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는 선언이었다. 또 당시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 업체들과의 기술 격차를 6개월 이상으로 벌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국내 전자산업 역사상 가장 먼저 일본을 제치고, 세계 시장을 제패한 반도체 신화가 본격화되는 신호탄이었다.
◇반도체 `극일(克日)`의 상징=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D램을 포함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다. 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쯔, 미쓰비시 등 일본 업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두 경쟁을 했다. 특히 1991년에는 NEC, 도시바, 히타치가 세계 시장 1~3위를 휩쓸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뒤늦게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삼성전자는 지속되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매년 대규모 투자를 해 해외 우수 인재를 확보하고 기술 및 양산 격차를 줄이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하지만 1983년 삼성전자가 6개월 만에 64K D램을 개발했을 때에도 일본 업체들은 `찻잔 속 태풍` `수준 미달`이라는 수식어들을 대며 폄하하기에 바빴다. 또 `20년이 지나도 한국 업체들은 일본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0년이 흐른 후 삼성전자가 일본보다 6개월 이상 앞서 256M D램을 개발하자 일본 업체들도 할 말을 잃게 됐다. 일본 언론들도 `일한(日韓) 역전`이라는 제목을 통해 후발주자였던 한국이 기술력으로 일본을 앞질렀다고 인정했다.
256M D램 개발은 1993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삼성전자가 양은 물론이고 질적인 측면에서도 확실하게 주도권을 쥐었다는 선언으로 큰 의미가 있다.
◇새로운 연구개발로 승부=삼성전자는 1992년 본격적으로 256M D램 개발에 착수했다. 이후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2년 6개월 동안 1200억원의 개발비를 투입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임을 감안하면 단일 제품으로는 실로 엄청난 투자비라고 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256M D램 개발 과정에서 경쟁 업체들이 사용하지 않던 새로운 방법으로 기술 혁신을 이뤄냈다. 256M D램 개발을 위해서는 머리카락 한 올의 480분의 1 굵기인 250나노미터(㎚) 선폭 기술이 필요했다. 또 회로를 그린 초소형 소자를 20겹으로 쌓아올린 회로를 만들어야 했다.
D램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회로를 최대한 미세하게 그리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 D램 업계에서는 미세 선폭 기술 개발과 회로 설계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250㎚ 선폭 기술을 먼저 확보한 후 256M D램 개발에 돌입했다. 삼성전자는 이미 16M D램에 250㎚ 기술을 적용했다. 이처럼 회로 기술을 먼저 확보한 후 집적도 향상에만 집중함으로써 개발 기간을 단축시키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는 당초 예정보다 시제품 생산을 6개월이나 앞당기는 결실로 이어졌다.
◇단 한 번의 테스트로 시제품 확보=1994년 8월, 유난히 무덥던 어느 날. 256M D램 시제품을 위한 모든 공정이 마무리된 10장의 웨이퍼가 삼성전자 팹에서 처음으로 출하됐다.
256M D램 개발팀과 임직원들은 숨죽여 테스트에 돌입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8장의 웨이퍼에 이르기까지 100% 작동하는 칩은 나오지 않았다.월 `실패`라는 단어가 떠오를 즈음, 마지막 두 장의 웨이퍼에서 100% 작동하는 칩이 나타났다. 이는 첫 번째 테스트로 100% 작동하는 시제품을 확보한 것으로 그 의미가 컸다.
드디어 연구원들의 환호성이 터지고 그들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 직원은 “일요일마다 회사에 나가며 아이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이제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린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될 수 있어 정말 기쁘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들이 쏟아낸 눈물과 땀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확고한 1위 국가 위상을 지키고 있는 우리나라 반도체 역사에서 특별히 기억돼야 할 값진 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한국, 반도체 세계 정상에 서다
삼성전자의 256M D램 개발 이후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한 반도체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한발 앞선 차세대 기술 개발 및 대규모 양산 투자라는 성공 방정식이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렇게 길러진 체력은 반도체 치킨 게임에서 승리하는 기반이 됐다.
삼성전자는 1996년 꿈의 반도체로 여겨졌던 1기가(G)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1기가 D램은 칩 하나에 신문 8000장, 단행본 320권에 달하는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대용량 메모리 칩이다. 또 초저전압 구동 기술을 적용해 소비전력을 낮추고, 빠른 처리 속도를 구현했다. 개발 과정에서 170여건에 달하는 핵심 특허를 확보함으로써 기술력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임을 과시했다.
차세대 제품 개발은 물론이고 양산 제품을 적기 생산해 시장 점유율에서도 초격차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1991년 16M D램 상용 제품을 세계 최초로 출하한 데 이어, 1993년에는 칩 면적을 25% 이상 줄인 2세대 제품을 양산함으로써 2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1992년 D램 시장에서 세계 1위에 오른 삼성전자는 1993년 메모리 반도체 전체 시장에서도 1위에 등극, 명실상부한 최대 메모리 공급업체가 됐다.
삼성전자와 함께 메모리 반도체 시장 2위 업체로 자리를 굳힌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와 LG반도체도 삼두마차 체제를 형성, 반도체는 우리나라의 대표 수출 상품으로 위상을 키워나갔다.
현대전자는 국내 최초로 16K S램 시험 생산에 성공했다. 또 LG반도체를 포함한 3개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반도체 신화를 일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 업체가 개발한 대부분의 제품들은 모두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이 같은 기술 개발 경쟁과 적극적인 양산 투자로 우리나라는 1994년 세계 최대 D램 생산국으로 부상했다. 삼성전자, LG반도체, 현대전자를 포함한 우리나라 업체들의 D램 시장 점유율이 22.3%를 기록하며 일본을 제친 것이다.
1995년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만 2조7192억원의 경이로운 흑자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반도체 전체 매출액도 당초 계획을 40%나 초과한 8조원을 웃돌았다. 이 같은 사상 최대 호황은 반도체 최대 수요처인 PC 산업의 호황에 따른 것이었다. 급속도로 진전된 정보화 및 컴퓨터 보급 확대로 반도체는 공급 부족 상황에 다다랐다. 또 2년 전 반도체 업계의 극심한 투자 부진으로 공급 확대가 한계에 다다르면서 삼성전자의 수혜가 가장 컸다.
삼성전자는 1993년 이후 메모리 시장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1995년 이후 기존 업체들의 적극적인 시설 투자와 대만 업체들의 시장 참여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불황에 빠져들었다. 또 1996년 초에 일어난 D램 가격 폭락으로 삼성전자 메모리 매출은 40% 가까이 감소했다. 이 같은 메모리 산업의 급격한 부침으로 삼성전자는 안정적인 성장이 가능한 시스템LSI 사업 강화에 나서기 시작했다. 2010년 이후 삼성전자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 시장 선점에 성공했다.
1999년 현대전자와 LG반도체 `빅딜`을 통해 탄생한 하이닉스반도체도 마이크론으로의 매각 무산 등 시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업계 2, 3위권을 형성하며 양강 체제를 구축했다. 특히 2012년 SK그룹으로 인수된 후 SK하이닉스로 새 출발하며 그동안 미진했던 연구개발 및 양산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양종석기자 jsy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