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법원 배심원들이 삼성에 디자인 특허침해 평결을 내린 지 10일이 넘었다. 온 나라가 특허 정국으로 혼란스럽다. 기업 간 특허 기술 소송의 본질과 달리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 탓이 클 것이다. 어느 새 국가 간 문제로 비화하는 듯하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나 할까. 우리 기업들을 겨냥한 미국 기업의 소송 공세와 이를 거들고 있는 미 법조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오비이락일까. 지난 주말, 미 버지니아주 법원은 듀폰의 영업비밀 침해사건과 관련해 코오롱에 1조원의 배상금을 물리는 판결을 내렸다. 코오롱의 특수화학섬유 아라미드 제품이 듀폰의 독자기술을 무단 도용했다는 것이다. 영업비밀 침해사건은 널리 공개되는 특허권 침해와는 다른 사건이다. 당사자의 주장만큼이나 은밀하고 모호해서 시각과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코오롱의 아라미드 매출은 30억원에 불과한데, 법원은 이의 300배가 넘는 배상액을 부과했다. 징벌적 배상의 범위를 넘어서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물건을 팔지 말라는 판매금지 조치까지 내렸다. 배심원단의 구성과 평결 내용에 이르기까지 전문성과 합리성을 결여했다는 지적이 또다시 나오는 배경이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LG와 팬택도 사정권에 들었다. 정보기술(IT) 기업이 1차 대상이지만 현대차, 포스코 등 모든 수출기업이 타깃이다. 특허괴물의 활동도 점차 노골화하고 있다. 더 이상 안전지대는 없다. 돈이 된다는 판단이 들면 거의 모든 기업이 특허 사냥감이 되는 식이다.
소송 건수만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 기업을 대상으로 한 특허소송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네 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지난 한 해 국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건수는 130건으로 2004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 특허분쟁 피소 건수에서 1∼4위가 모두 우리 기업이다.
보호무역주의 확산 탓이 클 것이다. 미국과 유럽발 금융위기로 촉발된 위기상황이 국가 간 이해관계를 더욱 첨예한 갈등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가전·TV·반도체·자동차·휴대폰·부품 등 산업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국가도 미국뿐 아니라 유럽연합(EU)까지 전선이 넓어졌다. IT 부문에서만 보면 보호무역주의의 무기는 반덤핑이 아니라 기술특허인 셈이다. 제국주의적 경제관도 한몫한다. 자국 기업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 들면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기술주도국으로서 비교우위가 사라지면서 지식재산권이라는 장벽을 쌓아 글로벌 경제의 지배력을 유지하겠다는 심산이다.
다행히 삼성이 일본에서 승리했다. 유럽과 나머지 지역에서의 승리가 관건이다. 일본 법정은 우리와 같이 통신·설계·부품 등 기술적 부분에 가치를 높게 부여하는 반면에 디자인이나 인터페이스는 평가가 낮다. 미국과는 다른 시각이다. 유럽은 반반이지만 역시 디자인보다는 통신기술 등 기술적 부분에 가치를 두는 편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전문가들은 집단적 자위권을 확립하라고 조언한다. 비애플·반애플 진영을 우군으로 확보하고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부품 조달력을 앞세워 전략적 다자 구도를 만들라는 것이다. 통신 특허뿐 아니라 현저히 낮은 디자인 특허 부문을 강화하고 소프트웨어도 강화해야 한다. 통섭적, 창조적 인재 양성과 혁신에도 지속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경영이론 전문가인 비벡 와드화의 `애플이 삼성전자 항소심에서 패해야 하는 이유`라는 칼럼은 의미심장하다. 기술 특허전에서 이기는지 지는지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의 혁신 전쟁에서의 성패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IT 기업이 특허를 보호하는 유일한 길은 상호 경쟁으로 혁신을 계속하는 퍼스트 무버의 길뿐이다.
정보사회총괄 부국장 sj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