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달 `온실가스 배출권의 할당 및 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배출권거래제)의 시행령(안)을 입법예고 했다. 산업계 반대로 장기간 표류한 배출권거래제는 지난 5월 극적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주무부처 선정 논란을 거쳐 이번에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시행령이 공개됐다. 규제심사·국무회의 등을 거쳐 무난히 시행될 것이라는 정부의 기대와 달리 산업계가 시행령 내용에 크게 반발하면서 배출권거래제 관련 갈등은 다시 한 번 확대되고 있다.
◇산업계 “무상할당 기간 연장해야”=시행령에 따르면 1차 계획기간인 2015~2017년에는 배출권을 무상으로 대상 업체에 할당하게 된다. 이후 2차 계획기간(2018~2020년)에는 97%, 3차 계획기간(2021~2025년)에는 90% 이하로 무상할당을 줄여나간다는 계획이다.
산업계는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경제 5단체를 비롯해 한국철강협회 등 17개 협회와 공동으로 배출권거래제 무상할당 기간을 2020년까지로 연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건의문을 정부에 전달했다. 유상할당은 원가상승에 따른 가격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과중한 비용부담은 국내 생산기지 해외이전, 외국인 투자기피, 고용감소, 물가상승 등의 문제를 야기한다고 지적했다.
산업계는 국내 기업들이 세계 유수 업체들과 경쟁하고 있는 만큼 배출권거래제 시행이 지나친 부담으로 작용해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경제구조가 우리나라와 다른 유럽연합(EU)과 같은 잣대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박태진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장은 “우리나라는 제조업 비중이 높고 경제성장이 아직 성장단계인 만큼 EU의 배출권거래제를 그대로 도입해서는 안 된다”며 “국제동향과 경제상황,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 등을 감안한 제도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산업계는 다양한 합의제 기구에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배출권거래제 주무부처를 환경부로 정하는 대신 집행 과정에서 각 산업 특성을 반영하기 위해 할당결정심의위원회·배출량인증위원회 등 합의제 기구를 구성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산업계는 타 부처 외에도 민간 대표가 직접 각종 위원회에 참석해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시민단체 “이미 산업계 부담 완화한 것”=정부는 1차 기간에 100% 무상할당 하기로 결정한 것 자체가 산업계의 입장을 많이 고려한 것이라는 반응이다. 입법예고 직전까지도 1%의 유상할당을 논의했지만 시행초기라는 점과 업계 상황 등을 고려해 100% 무상할당을 결정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남광희 녹색성장위원회 기후변화대응국장은 “무상할당과 관련 산업계와 NGO에서 다양한 건의가 있었지만 산업의 부담을 최소화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녹색기술 투자 확대, 최소한의 가격반영 기능 등을 고려해 1차 기간 100% 무상할당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환경정의 등 시민단체는 시행령이 오히려 산업계에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주장한다. 배출권거래제의 본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규제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박용신 환경정의 사무처장은 “지난해 처음 법안이 나왔을 때는 1차 기간 무상할당이 90% 이상이었는데 이번에 100%로 바뀌었다”며 “유상할당이 있느냐 없느냐 자체가 중요한 문제로, 배출권거래제는 기본적으로 유상으로 이뤄진다는 의식을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은 “산업계가 경쟁력 저하를 우려하고 정부의 대책을 요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이 요구가 제도의 도입 취지를 흔들고 성공 요인마저 사전에 없애는 수준이라면 곤란하다”며 “시행령이 변화 없이 그대로 시행되면 1·2차 기간에 많은 혼란과 부작용이 예상되는 만큼 정부가 실효성·공정성·투명성 등을 고려해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박태진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연구원장
“우리보다 먼저 배출권거래제를 시작한 외국의 사례를 꼼꼼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박태진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연구원장은 유럽의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가격이 지난해의 3분의 1수준으로 떨어진 톤당 3유로에 불과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경제여건이 좋지 않고 거래제는 힘을 잃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우리나라도 배출권거래제를 합리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 원장은 “시행령 제정 시 국제동향과 경제상황 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며 “제조업 비중과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해 산업계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제도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산업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무상할당 시기를 연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정한 100% 무상할당 기간을 기존 2015년에서 2020년으로 늘리고 이후 국제여건을 고려해 무상할당 비율을 조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성공적인 배출권거래제 시행은 공정한 배출권 할당에 있다고 밝혔다. 정확하고 공정한 할당을 위해서는 정부와 산업계간 소통창구가 필요하다는 게 박 원장의 생각이다. 주무부처인 환경부 뿐 아니라 산업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관련 부처의 참여도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원장은 “배출권거래제의 가장 큰 목표는 온실가스 감축으로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규제 뿐 아니라 지원이 필요하다”며 “온실가스 감축기술 개발을 위해 정부의 지원을 확대하고 중요계획 수립 시 민간이 함께 참여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산업계는 온실가스 감축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우리 기업들이 국내가 아닌 국제적으로 경쟁을 하고 있는 만큼 공평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정부가 바탕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배출권거래제, 해외에서는
해외에서 배출권거래제를 운영하고 있는 곳은 EU·뉴질랜드 등 소수에 불과하다.
EU는 지난 2005년 총 25개국 약 1만1500개의 사업장을 대상으로 배출권거래제(EU-ETS)를 시행했다. 2008년부터 30개국을 대상으로 2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내년부터 본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3기 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최근 배출권 과잉현상이 나타나면서 배출권 가격이 지난해의 3분의 1 수준인 톤당 3유로까지 내려갔다. 일각에서는 3기 사업 시행이 연기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호주는 교토의정서에 따른 온실가스 의무감축국가로 2007년부터 국가 온실가스 의무보고 제도(NGER)를 도입해 사업장 단위의 산정·보고·검증체계를 구축했다. 지난 7월부터 대형업체에 배출권 구입의무를 부과하는 배출권 고정가격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2015년 7월부터 배출권거래제를 본격 도입한다.
이 밖에 중국·미국·인도·러시아·일본 등 세계 탄소배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5개국은 아직 배출권거래제를 전면 도입하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은 지역 단위로 일부 시행하고 있다. 중국은 내년 베이징 등 7개 지역에서 시범사업을 시작하며 2015년부터 국가 단위 거래제를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유선일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