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회사 AVM은 창업 초기부터 투자를 받지 않기로 했다. 회사를 빨리 성장시켜 투자자가 자금을 회수하게 하는 게 기업 설립 목적에 반한다고 봤다. 내실을 다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회사가 만든 무선랜 공유기, TV 셋톱박스 `프리츠박스`는 유럽 가정에서 흔히 보는 제품이 됐다.
베를린 혁신센터(IZBM:Innovations-Zentrum Berlin Management)를 운영하는 플로리안 자이프 박사는 “최근 몇 년간 지원한 스타트업 기업 가운데 태양광, 바이오 등 이른바 벤처투자를 받아 창업했던 회사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며 “투자 받을 당시엔 성공적인 회사로 보였지만 투자자금에 기대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지속하기는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 센터는 벤처·창업 투자자 자금을 끌어들여 종잣돈을 마련해주기보다는 정부 자금 대출 주선에 더 열심이다. 시류를 좇아 창업을 하고 투자자금이 몰렸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회사는 물론이고 임직원에게도 힘든 시기가 찾아온다. 독일은 대를 이어 가업을 영위하거나 믿을 만한 후배에게 기업을 물려줘 오랜 세월 노하우를 쌓아가는 회사를 가장 이상적으로 본다. 이 나라에 100년 넘게 지속되는 기업이 많은 이유다.
한국은 지금 스타트업 전성시대다. 많은 창업자들이 온라인·모바일로 단숨에 성장하고 인수합병(M&A)을 거쳐 돈을 벌기를 원한다. 뚜렷한 수익 모델이 없어도 일단 자금을 유치하고 마케팅으로 고객부터 유치하는 게 하나의 전략이 됐다. 대기업이 인수를 노릴 만한 사업 아이템과 인력을 꾸리는 데 골몰한다. 당연히 M&A 가능성이 큰 회사가 투자받기도 쉽다. 후배를 길러내겠다는 선의의 투자자도 물론 있다. 하지만 자본의 속성은 길게 인내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때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이 침체됐던 당시, 갈 곳을 못 찾은 자본은 창업 시장으로 갔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이 또다시 침체한 요즘, 돈은 어디로 흘러가고 어떤 결과를 기대할까. 한국에서 100년 기업이 나오는 걸 꿈꾸는 건 공상일지 모르겠다.
베를린(독일)=오은지 벤처과학부 onz@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