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식물학자, 평생 모은 학술자료 기증

(특별인터뷰) 한국 식물분류학계의 거목, 죽파 이우철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한평생 모은 식물DB, 한국수목원에 기증

“제주도에 핀 홀아비꽃대는 비스듬이 누워있는데, 서울에서 찍은 사진에는 왜 똑바로 서 있을까요?”

“서로 다른 꽃이에요. 제주도에선 흔히 홀아비꽃대나 과부꽃대로 부르지만, 알고보면 진짜이름은 옥녀꽃대랍니다. 1930년대 일본학자 나카이가 거제도 옥녀봉에서 발견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데, 얼핏보면 영략없는 홀아비꽃대처럼 보이죠.”

“선생님, 오페라 춘희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는 흰 동백꽃과 붉은 동백꽃을 번갈아가며 가슴에 꽂고 호색한들의 애간장을 녹이잖아요. 그런데 김유정 소설 속에서는 봄날 노랗게 퍼드러진 동백꽃을 묘사한 장면이 많거든요. 노란 동백꽃도 피나요?”

“김유정선생의 고향인 강원도에는 동백나무가 자라지 않아요. 옛 여인들이 동백나무 씨앗으로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발랐다는 건 다들 아시죠? 동백이 없는 강원도에선 비슷한 생김새에 노란 꽃이 피는 생강나무 열매로 기름을 만들었어요. 생강나무 꽃 이름을 동백이라 잘못 불러왔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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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철교수가 1984년 대성산에서 발견해 학계에 보고한 '대성쓴풀'(좌), 야책을 메고 다니면서 직접 채집한 희귀종 백설취 표본

죽파 이우철(80) 강원대학교 명예교수는 ‘국가대표 식물박사’로 불린다. 후학들을 이끌고 야생화 생태조사를 나갈 때면, 우리땅에 사는 꽃이며 풀에 대해 쏟아지는 질문에 늘 이처럼 명쾌한 대답을 들려주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한국 식물분류학계의 거목(巨木)이자 후배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노학자로 손꼽힌다.

이교수가 존경받는 이유는 학문적인 업적은 물론 남다른 집념과 열정 때문이다. 사실 식물분류학은 생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유전공학이나 분자생물학처럼 각광받는 인기과목과 달리 ‘빛을 보기 어렵고 고생길만 훤한’ 기초과학쯤으로 여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식물의 이름을 밝히고 계통체계를 세우는 학문이다 보니, 박사과정만 밟으려해도 산과 들을 헤매며 식물을 채집하고 식생변화를 조사하는 일로 사계절을 보내야 한다.

이교수는 식물을 담을 수 있도록 대나무를 철사로 엮어 만든 야책(野冊)을 둘러메고 명산의 고봉준령부터 버려진 야산까지 수십년간 산이란 산은 모조리 찾아다니면서 한평생을 식물분류학 연구에 헌신했다.

“남들에겐 지루한 식물분류가 저한테는 더없이 흥이 나는 일이었죠. 해방 전 어린시절부터 산에 놀러갔다가 신기한 식물을 발견하면 신문지 사이에 펴서 넣고 아래위 나무판을 댄 후 다듬잇돌로 눌러 표본을 만들곤 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생물학과 시절엔 시장에서 구입한 낡은 군복과 군화 차림으로 새벽부터 이산저산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면 어느새 한밤중이 되곤 했죠. 죽고난 다음 하나님이 살아생전 뭐하다 왔냐고 물으시면, 아마 대한민국에서 자생하는 유관속식물의 호구조사원으로 일하다 왔다고 말할겁니다.”라며 이교수는 껄껄 웃어보인다.

유관속식물이란 물관을 지닌 식물로, 이끼나 버섯을 제외하고 우리가 흔히 보는 대부분의 식물들이 포함된다. 이교수에게 즐거운 작업이라는 ‘유관속식물의 호적부 정리’가 사실은 엄두를 내기 어려울 만큼 방대한 일이다. 예를 들어 한방에서 뜸과 산후 조리용 약재로 쓰는 ‘참쑥’만 해도 ‘부엉다리쑥’ ‘몽고쑥’ ‘인도쑥’ ‘산분쑥’ ‘광대쑥’ 등 갖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1949년 ‘조선식물명집’에 수록된 참쑥이 표준명이라는 것을 알아내려면 일일이 문헌을 뒤져봐야 한다. 우리나라 식물분류의 역사는 1800년대 말 외국학자들에 의해 시작됐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신종 식물의 기재문과 기준표본들 대다수가 외국 표본관에 소장되어 있는데다, 그나마 국내 표본들도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이 많아 확인작업은 쉽지 않다.

이교수는 잃어버린 식물분류학 연구의 단편들을 찾아 수십년을 보내는 동안 학술지에 기재된 논문만 142편에 10권의 저서를 냈다. 지난 1996년 펴낸 <한국원색기준식물도감>과 <한국식물명고>는 그의 학문적인 업적이 집대성된 책으로 평가받는다. 정년퇴임 후에도 <한국식물명의 유래(2005)> <한국식물의 고향(2008)> <한반도 관속식물 원기재문 I> 등을 펴냈다. 특히 “한반도 관속식물 원기재문”은 한국에 나는 식물들이 신종으로 발표될 때에 라틴어로 작성된 설명문(원기재문) 5000여건의 모음집으로, 앞으로 후학들의 연구에 많은 도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교수는 앞으로 여력이 있는 한 후학들을 위한 자료를 정리하는데 힘쓸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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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광릉의 국립수목원에서는 그를 위한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이날 산림표본관에서는 이교수가 기증한 학문적 성과물들을 죽파자료실에 영구보존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한 ‘명예의 전당 헌정식’이 열렸다.

이날 헌정식에서 신준환 국립수목원장은 “죽파 선생님이 한반도 전체 식물에 대한 학명과 원기재문을 정리하신 한평생의 연구성과를 기꺼이 기증하심으로써, 이제는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과거의 한반도 식물을 후학들이 수목원 자료실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면서 “우리 식물에 대한 앞으로의 연구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해주셨다”고 노학자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을 표현했다.

국립수목원은 이번에 기증된 자료가 후학들을 위해 널리 사용되기를 바라는 이우철교수의 뜻을 살려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http://nature.go.kr)’를 통해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할 계획이다.

생물다양성 협약 등으로 자국의 생물주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이 활발히 진행되는 가운데, 식물표본은 그 식물이 분포했던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반영하는 중요한 증거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에 대한 실체를 밝히고 학명을 부여한 기재문과 확증표본 및 연구자료 역시 생물주권 확보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산수(傘壽)를 넘긴 노학자의 ‘아름다운 기증’과 이를 ‘명예의 전당’으로 화답한 수목원의 헌정식 행사는, 신록의 계절을 맞아 수목원을 찾은 많은 관람객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참뜻을 떠올리면서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묻어났던 ‘행복한 장면’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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