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돈의 인사이트]현실왜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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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타트렉`엔 외계인들이 순전히 정신력만을 이용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현실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이 등장한다. 현실왜곡장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점프하며 우주공간에서 급격하게 공간을 이동하는 개념이다. 1980년대 애플 직원들은 스티브 잡스가 분명히 불가능할 것 같은 프로젝트를 끈질기게 설득하고, 때로는 협박으로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고 이 같은 별명을 붙였다. 잡스가 말하면 무엇이든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고,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된다는 의미다.

현실왜곡장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현실을 뛰어넘는 비전을 품고 그것을 스스로 내면화한다. 그리고 주변 현실을 자신의 뜻대로 변하게 한 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믿게 만든다. 단순히 `열정`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현실왜곡장의 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그래서 회사 비전을 설득해야 하는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에게 현실을 뛰어넘는 새 개념을 창조하는 현실왜곡장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자유롭게 현실왜곡장을 구사한 스티브 잡스의 경영 스타일을 흉내내는 경영진이 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언수 소설 `캐비닛`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변종(變種)`들이 등장한다. 소설에서 변종들은 생물학이나 인류학이 규정한 인간의 정의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이들은 현 인간과 새로 태어날 미래 인간 사이, 즉 종의 중간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쉽게 말해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난 인물들이다. 예를 들어 `메모리 모자이커`라는 변종은 자신의 기억을 조작해 새 추억을 만들어낸다. 불행한 기억에서 벗어나 행복한 추억만을 가지고 싶기 때문이다. 또 뱀이나 곰처럼 6개월이나 1년 정도 겨울잠을 자는 `토포러`라는 변종도 나온다. 한순간에 시간을 뛰어넘는 `타임 스키퍼`와 입안에 도마뱀을 키우는 `키메라`도 등장한다.

이런 변종들은 소설가가 만들어낸 완벽한 `거짓말`이다. 그런데 변종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왠지 낯설지 않다. 작가 스스로 현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진화의 압박을 받는 만큼 새로운 변종의 징후가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능청스럽게 말한다. 완벽한 거짓말임에도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는다. 인류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엄청나고 거대한 변화가 온다는 사실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은 기술 혁신으로 인해 진화 경로가 급작스럽게 변화되곤 했다. 농업혁명, 도시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컴퓨터 혁명에 이르기까지 기술 혁신은 엄청난 인류 문명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학자들은 단순한 기술적 변화로 인해 인류 문명 경로가 변화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단언한다. 대량으로 쌀을 생산하는 벼 품종을 발견했다고 농업혁명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과일을 따먹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농토를 개발하고 씨를 뿌려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는 경작(cultivation)에 관한 개념이 구축될 때 비로소 농업혁명이 잉태될 수 있었다. 산업혁명에서 증기 엔진의 발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기계를 사용하는 공장(factory)에 관한 관점의 형성이다. 증기 엔진은 그러한 기계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요소일 뿐이다.

미래 시장은 `안정과 균형`보다 `혼돈과 불균형`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해진 목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스마트한 미래를 준비하기 어렵다. 인류 생활을 바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할 수 있는 현실왜곡장의 능력이 필요하다. 혼돈의 시대에 신념을 가지고 스스로 개척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미래를 여는 유일한 실마리다.


주상돈 벤처경제총괄 부국장 sdjo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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