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이 다른 두 사람이 있다. 고소득자 A는 언제나 일에 쫓기며 바쁘게 산다. 고급 자가용으로 출퇴근하고 도우미에게 육아와 가사를 맡긴다. 반면에 소득이 적은 B는 걸어서 일을 보러 다니며 육아는 물론이고 요리와 빨래도 직접 해야 한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할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치가 않다. 부자인 A가 행복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고 100% 확실한 것은 아니다. 많은 돈과 권력이 곧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행복한가 안한가는 개인적 기준과 상태, 마음가짐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행복을 정확한 잣대로 잴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행복지수`를 보면 한국인은 불행하다. 34개 회원국 중 호주가 1위, 한국은 26위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1.5명으로 OECD 평균(11.7명)의 두 배다. 어린이 행복지수는 OECD 회원국 중 꼴찌다.
한국은 올해 4%대 혹은 그 이하의 저성장 시대에 들어선 상황에서 세계적 불황까지 겹쳤다. 주머니는 비었는데 쪽박마저 깨지게 생긴 것이다. 불평등은 심화되고 대기업과 금융권이 정부와 짜고서 부자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는 불신이 폭발 직전까지 왔다. 한국 젊은이 수백만명이 대통령과 기득권자를 조롱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분노를 키운다.
이런 현실은 최근 선거 시즌을 맞아 정치권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이제는 잘사는 나라가 아닌, 우리 국민을 더 행복하게 해줄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 국가 미래보다는 표를 겨냥한 포퓰리즘식 공약이 더욱 판을 친다. 저축은행특별법을 비롯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와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 및 원전(原電) 건설 반대 등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인다. TV와 인터넷은 물론이고 트위터·페이스북 등까지 총동원 태세다. 급기야, 국민들의 경제적 행복을 결정하는 새로운 지표로 `행복지수`를 만들겠다는 공약까지 등장했다. 기존 성장률, 경상수지, 가구소득 등으로는 국민적 행복도를 측정하기 어렵다는 논리다.
과거에도 행복을 측정하는 공식을 만들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미국 경제학자 새뮤얼슨은 `행복=소유÷욕망`으로 정의했다. 소유가 일정하다면 욕망을 줄여야 행복해진다는 의미다. 영국 심리학자 로스웰도 `행복=P+(5×E)+(3×H)`이란 행복공식을 제시했다. 개인적 특성(Personal)보다 건강·돈 등 생존조건인 E(existence)가 5배, 자존심·야망 등 상위욕구인 H(higher order)가 3배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국가적으로는, 히말라야 아래 작은 나라 부탄이 1970년대 국내총생산(GDP) 대신에 국민총행복(GNH)을 내세운 최초 국가로 꼽힌다. 그러나 부탄도 소득이 오르고 집집마다 TV가 보급돼 바깥세상 소식을 접하면서 행복 순위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만큼 행복은 상대적이다.
러시아 탐험가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에프 대장이 시베리아를 탐사한 기록에는 한 늙은 사냥꾼 `데르수 우잘라` 얘기가 나온다. 어느 날 대장이 데르수에게 물었다. “별이 뭘까?” “저기 별 떴다. 보면 된다!”, “그럼, 하늘은 어떤 의미일까?” “환할 때 파랗고, 캄캄해지면 까맣다. 비올 때 흐리다.” 이번엔 데르수가 오히려 대장에게 말한다. “다 볼 수 있어, 근데 대장은 매일 묻는다. 대장 눈 나빠?” 자연속 모든 것은 그저 그대로 존재한다. 오직 문명의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만 그 사실을 모른다. 문명의 눈으로 행복을 갈망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불행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명적 행복을 약속하는 정치인을 선택하는 순간, 대한민국 행복지수는 내려간다.
주상돈 경제정책부 부국장 sd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