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좀 더운 것 같은데, 온도를 너무 높게 설정해 놓은 것 아닌가.” 여름 이야기가 아니다. 올 겨울 들어 기온이 가장 내려간 지난 주말, 오랜만에 들른 집 근처 백화점에서 아이들 엄마가 한 이야기다. 실내온도를 직접 측정하지는 않았지만 체감온도가 꽤 높았다. 자칫하면 올 겨울에도 지난여름 경험한 9.15 정전사태가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신문·방송 보도를 보고 스스로 감시단이 된 것처럼 한 말이다.
이달 초 에너지시민연대가 서울 등 전국 10개 도시에서 공공기관과 일반사업장 875곳을 대상으로 겨울철 실내 난방온도 실태를 조사한 결과, 정부 권장 난방온도를 지킨 곳은 공공기관이 325곳 중 85곳이었고 일반사업장은 552곳 중 239곳에 불과했다. 공공기관은 네 군데 중 세 군데가 권장온도를 지키지 않은 셈이다. 일반사업장은 조금 나은 43.2%로 집계됐다. 공공기관 권장온도가 일반사업장보다 2도 낮은 18도이긴 하지만 준수율 26.3%는 칭찬할만한 수치는 아니다.
지난 15일에는 지식경제부와 지방자치단체·에너지관리공단·시민단체가 함께 올 들어 처음으로 난방온도 점검에 나섰다. 온도제한 대상은 계약전력 100㎾ 이상인 전국 5만8000개 건물이다. 1회 위반하면 경고장을 발부하고 5회 위반하면 최고 300만원까지 과태료를 부과한다.
아침기온이 영하 5도까지 내려간 첫날 서울지역 단속현장 풍경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권장온도를 벗어난 사업장에 경고장을 발부하려는 단속반과 정부시책에 따라 전력피크 시간대에 맞춰 난방시스템을 껐다고 주장하는 사업장 직원의 크고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최악의 전력난을 겪고 있는 이웃나라 일본은 달랐다. 일본이 시행하는 전력사용 제한령은 평일 낮 전력 사용량을 전년대비 15% 절전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지난여름 일본은 여름철 전력피크를 무사히 넘겼을 뿐 아니라 의무비율인 15%를 훌쩍 뛰어 넘는 21%를 줄였다.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기적처럼 해냈다. 일본이 15% 절전에 성공한 배경에는 정부의 대국민 호소와 함께 기업인, 국민 한명 한명이 스스로 실천하려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국민성도 작용한 것 같다. 일본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한 사장은 “혹시라도 내가 지키지 않으면 옆집까지 제한송전이라는 피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씩 더 절전하다 보니 21%까지 절약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일본에서 생활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지난여름을 견뎌내는 일본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고 덧붙였다.
지난주엔 12시간 간격으로 원전 2기가 멈추는 사고가 있었다. 동계피크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원전 2기가 가동을 멈추자 전력예비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지기도 했다. 멈춰선 원전 2기 모두 재가동에 들어갔지만 적어도 우리나라는 건설 중인 중대형 발전소가 완공되는 앞으로 3년 동안은 여름철과 겨울철 전력난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만나는 전기업계 종사자나 전기 학자들은 ‘9.15 정전사태’라는 단어가 국민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가장 무섭다고 입을 모은다. 내복 껴입기, 개인용 전열기기 덜 쓰기, 안 쓰는 PC 끄기 같은 사소한 일도 몸에 밸 수 있도록 생활해야 한다.
우리는 강한 저력을 갖고 있다. 온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에 나서 IMF 관리체제를 조기 졸업한 대한민국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나부터 에너지 사용을 줄이면 적어도 국민 모두가 제한송전이라는 불행을 경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 아픈 9.15 정전사태이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주문정·그린데일리 부국장 mjjoo@etnews.com